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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매향,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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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전성태/1997년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은 길가메시다. 활발한 토판 발굴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를 대신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서사시로 인정받고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신들 중에서 또 한 명의 빼놓을 수 없는 신이 있다. 바로 엔키두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목축사회를 상징하는 엔키두와 농경사회를 상징하는 길가메시의 대결로 시작되지만 엔키두의 죽음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목축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엔키두의 죽음은 길가메시로 하여금 또 하나의 숙제를 안겨준다.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되살리고 영생을 주기 위해 머나먼 여행을 떠난다. 게다가 엔키두의 죽음은 길가메시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한다. 길가메시의 여행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한 여정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 세상에서도 그렇듯 신들의 세계에서도 죽음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이다. 결국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되살리지도, 영원히 늙지 않고 살게 해줄 불로초를 구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고 만다. 사라진 것(목축사회)에 대한 향수와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애도를 그린 작품이 <길가메시 서사시>인 것이다. 

 

죽음은 공포다. 죽어야 할 운명에 놓인 당사자에게도 그렇지만 산 자에게는 더 무서운 경험적 공포일 수도 있다. 한편 죽음은 남겨진 자에게 평생 풀기 어려운 숙제를 안겨주기도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단절이 아닌 죽은 자와 산 자의 새로운 관계정립의 시기가 도래하는 시점이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산 자는 죽은 자를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실제 장례 문화에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러 문화행사에서 볼 수 있는 씻김굿이 바로 그런 의식의 일종이라 하겠다. 사령의 신체 모형을 만들어 무녀가 씻기는 것으로 죽은 자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 극락으로 보내주려는 의식이다. 씻김굿은 전라도 지역에서 행해졌던 의식으로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이름과 형식으로 산재해 있는데 이런 의식을 통틀어 사령제라고 한다. 이런 의식의 일종으로 '매향'이라는 것이 있다. 전성태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매향이 어떤 의식이고 저자가 매향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주고픈 얘기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매향(埋香)

 

댓잎싹이 몬자서 우우우 울면 필경에는 저어 감은돌이재로 눈이 마악 몰레와서무네 금방 보리밭 몰랑이 흐옇게 되야. 그람 그해 보리농새는 대풍이라고 온 동네가 기양 갱아지들 모냥 들뜨는디, 그럴 것이 거긴 양지뜸이라 고런 눈 쌓인 삼동이 드물었기덩. 유월 타작마당이 끝나믄 보리밭마동 북데기를 모닥그라서 사무 태와싸. 그래야 풍년이 든다고. 그 매운 냉기가 또 으띃게나 고롷게 흐열꼬! 온 부락이 기양 자욱룩한 눈 속이야. -<매향> 중에서-

 

한국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전성태의 <매향> 첫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동네>의 이문구나 <동백꽃>의 김유정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의 소개를 인용한다면 전성태는 '사라져가는 농촌 공동체와 자연적인 삶에 대한 강한 향수를 토속적 어휘, 해학적 필치, 견고한 구성과 묘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능수능란한 방언의 구사는 김유정과 이문구의 계보를 잇는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농촌 젊은이의 한나절을 해학적인 필치로 형상화한 단편소설 <닭몰이>가 당선되어 등단한 전성태의 작품세계는 <매향> 등 12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매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편 요즘 젊은 작가로는 드물게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잘못된 표준어 정책에 길들여진 요즘 독자들에게는 해독을 요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위에 소개한 소설 <매향>의 도입부처럼 말이다.

 

'매향'의 사전적 의미는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향을 강이나 바다에 잠가 묻는 일'이다. 소설은 폐광촌 여인숙 주인인 할멈과 소리꾼 우서리 영감의 대화로 진행된다. 할멈은 평생을 방황하며 살다 몸값으로 여인숙 하나를 남겨 놓고 동지나해에서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우서리 영감에게 매향 의식을 요청한다.

 

마침내 할멈은 우서리 영감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끌었다. 우서리 영감은 허허, 하면서도 북이며 향낭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할멈이 마루에서 술잔과 화로를 가지고 들어오자 아랫목에 자리를 잡은 우서리 영감은 북을 밀쳐놓고 향낭을 풀어 헤쳤다.

시방 소리는 못허고 대신 향을 묻어줄 텡께 으디 구신 내력이나 야그해보시오. -<매향> 중에서-

 

할멈의 기구했던 운명은 매향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다. 아니 매향 의식을 통해 할멈은 기구했던 자신의 운명을 위로받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할멈에게 죽음은 마치 하나의 일상이다. 다섯 동생이 먼저 죽었고, 자식이 먼저 죽었는가 하면 마을 광산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이웃한 종덕 어멈의 남편까지 자살하는 등 할멈에게 죽음은 사건이면서 일상이다. 누구에게나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죽음은 일상일 수밖에 없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죽음을 내면화하는 과정은 어쩌면 자신의 삶을 다독이고 삶에 대한 열정을 다잡는 계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은 자의 내세에서의 복을 빌기 위한 의식들이 단순히 슬픔의 형상화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할멈은 설핏 잠이 들었다. 그 얇은 잠에서 다섯 동생들이 다 보였는데 유독 막냇동생만 보이지 않아 할멈은 '아가~아가~' 애타게 부르며 찾아 헤매었다. 눈만 자우룩한 바다이기도 하고, 꽃비가 나부끼는 산 속이기도 했다. 그곳에 막냇동생이 콩나물을 집어 먹고 있어서 '아가~'하고 불렀더니, 돌아보는 얼굴은 죽은 아들의 얼굴이었다. -<매향> 중에서-

 

민중의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연민

 

그렇다면 저자에게 소설 속 죽음들은 어떤 의미일까.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삶이 산 자에게는 마치 일상처럼 느껴지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 즉 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수와 의지를 죽음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 속 배경이 폐광촌이라는 것과 아들이 원양어선을 타고 멀리 동지나해에서 죽은 것, 전쟁으로 남편과 헤어져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할멈의 운명은 근현대사 속에 민중들의 삶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그런 민중의 삶을 복원하고 그들의 삶을 위로하고자 한다. 저자의 의도는 민중의 삶을 복원하고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쉬 잊혀지지 않기 위해 내면화하는 것이다. '매향'은 그런 의식의 일종일 것이다.

 

쉬 잊는 것도 벌 받을 일이제만, 잊을 사람을 가슴에 묻어두는 것도 죄다.

할멈은 연탄아궁이를 열고 그 위에 주민등록증을 올려놓았다. 주민등록증은 쥐포처럼 말려서 오므라들다가 불꽃을 일으키며 자글자글 타 들어갔다. 그 앞에 앉아 할멈은 오래전부터 해오던 대로 두 손을 맞비비며 중얼중얼 치성을 드린다. -<매향> 중에서-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민중의 삶이 그랬다면 현대사회에서 민중들의 삶은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고달프다. 비루하다. 사람이 아닌 돈을 본(本)으로 하는 사회가 영속되는 한 사회적 약자로서의 민중의 삶은 시대의 폭압을 비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상에서의 죽음이 다변화(?)되는 양상도 계층으로 위장된 계급사회 민중들의 운명이지 않을까. 저자의 죽은 자에 대한 위무(慰撫)는 작가적 소명의식의 발로이자 천착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웬 짚은 한숨이유?

나가 전생에 무진장 죄가 많었는가 벼야. 조실부모하고 자식 한나 있는 것도 몬자 보내고, 그도 못 해서 제일 큰성이 돼가지고설랑 아래 다섯 동상들 앗아가는 것까지 다 봤으니……

복이지요, 뭐.

아야, 말이래도 그런 소리 말라. 사람살이가 어디 그러냐. 제 몫 다했다 싶으면 가는 거이 목심이지, 인자 더 살면 그건 다 껍디기다.

누, 우리는 다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 몰러. 그냥 우리찌리 살어도 짧은 거이 요쪽 시상인디 말이요.

긍께 말이다……올 저울은 퍼그나 짚을 모냥이다…… -<매향> 중에서-

 

필자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다시래기'라는 독특한 장례문화가 있었다. 외지인들이 보기에는 퍽이나 낯설고 심지어 도통 이해하기 힘든 의식일 수도 있겠다. 죽은 자의 내세에서의 복을 빌기 위해 상주와 밤새워 노는 것도 모자라 장구와 징, 꽹과리 장단에 맞춰 남녀가 어울려 시끌벅적한 춤판까지 벌이니 말이다. 엄숙한 요즘의 장례문화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원형만 보존해야 할 가치로 인정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죽은 자를 위무하는 방식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 다르다. 분명한 것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죽은 자(민중)의 삶을 복원해서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산 자의 삶에 대한 열망과 열정을 보다 극대화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편 저자가 어느 글에서 '산업화에 흩어진 개인들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농촌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듯이 공동체적 삶의 복원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현대사회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실 또한 주목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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