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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선천성 뇌성마비 문성현씨의 장애 극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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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문성현/윤영수/1997년

 

얼마 전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담은 책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씨가 도쿄 시내 한 음식점에서 퇴짜를 맞은 사실을 트위터에 올려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식당은 건물 2층에 위치해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이 걸어서 올라갈 수 밖에 없는데 오토다케씨는 식당 측에 자신을 안고 올라갈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일본 네티즌들이 양측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였다는 데 필자 생각으로는 식당측의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를 문제삼기 전에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무작정 자신을 안고 2층으로 올라갈 줄 것을 요구한 오토다케씨의 경솔함이 더 문제인 듯 싶다. 필자가 뜬금없이 이 사건을 언급한 것은 일본이건 우리나라건 비록 장애인이지만 오토다케씨가 유명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에 대한 처우나 시선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장애인이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교사가 되고, 고위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이 됐다는 뉴스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시선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장애인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부딪쳐야 할 장벽들이 너무도 많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지역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이들 교육에 안좋다거나 땅값이 떨어진다거나 한다는 이유로 혐오시설 취급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늘 이성과 감성의 충돌 속에 살고 있다. 여전히 장애인이 살아가기에는 편견과 차별의 벽은 물론 일반인의 시선도 썩 개선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들의 장애 극복기는 감동을 줄지언정 그들과 일반인 사이에 놓여있는 견고한 유리벽을 해체할 만큼의 파괴력은 없어 보인다.

 

 

착한 사람 문성현

 

강경애의 <지하촌>,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하근찬의 <수난이대>, 신경숙의 <빈집>. 이 소설들의 공통점은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소설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장치로 장애인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즉 등장인물의 육체적 장애의 문제가 장애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한다. 그러나 윤영수의 소설 <착한 사람 문성현>은 여지껏 장애인이 등장했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작품이다. 장애인 자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 39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문성현씨의 삶의 궤적들을 추적하며 그가 장애인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갈등을 관찰자와 전지자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속에서 그는 많은 이들을 차례로 만나보았다. 눈을 떠보니 검은 옷을 입은 신부가 서 있었다. 그가 물었다.

"문성현씨, 하느님을 믿습니까."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하느님, 그 하느님이라면 믿고 말고, 어머니 곁에 갈 수만 있다면. 그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신부를 올려다보았다. -<착한 사람 문성현> 중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다. 신을 믿지 않겠다던 문성현씨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신의 존재를 믿게 된 것도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어머니가 계신 세상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쁨 때문이었으리라. 한편 문성현씨가 살아생전 어머니에 대한 시선은 정상인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니 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할 고통은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분노가 뒤섞인 채 내적 갈등을 유발한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였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조용해지고부터, 체머리를 흔들지 않고부터, 입을 다물고부터 그는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그 속에 산과 들, 밀림이 있었다. 몸집이 큰 코끼리, 기린, 갖가지 색깔의 크고 작은 새들이 있었다. 먼 나라에는 이상한 풍습을 가진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볼수록 흥미진진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이처럼 앉지도 서지도 걸어 다닐 수도 없는 그에게는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다른 이들의 삶이 한편으로는 가슴 떨리는 열망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부숴버리고 싶은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착한 사람 문성현> 중에서-

 

저자는 정상인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장애인만의 고통과 갈등을 직접 문성현씨 머릿 속에 들어가 생생하게 보여준다. 때로는 심각한 절망감과 자기분열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망의 끈을 잡기 위해 온몸에 멍이 들도록 자신을 채찍질한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목을 가눌 수 있게 되고 글도 익힌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문성현, 그만하면 자네도 미남이야."라고 자기최면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장애인인 문성현씨가 부닥쳐야할 세상은 육체적 고통 그 이상의 무엇이다.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이렇게 낳아준 어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한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있는 세상은 그가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다. 그렇게 문성현씨는 스스로 살아갈 세상을 하나씩 그려나간다.

 

바로 그 해였다. 먼먼 동해바다에서 하늘로 떠오른 히. 아버지의 그 해가 서울에까지 날아와 그의 거실에 기어들고 있었다. 아버지, 아, 아버지. 그는 마음 놓고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와 너털웃음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두팔로 윗몸을 일으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오래오해 해바라기를 했다. 번데기에서 갓 나온 나비가 젖은 몸을 햇볕에 말리는 모양이 꼭 이러하리라. 그는 이제야……성충이 된 것이었다. -<착한 사람 문성현> 중에서-

 

그는 왜 착해야만 했을까

 

소설에서 문성현씨가 죽는 순간까지 품에 간직하려 했던 장난감 활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문성현씨는 막내동생 승현의 돌상에 돌잡이로 올렸던 물건인 장난감 활이 방구석에 놓인 걸 보고 몸을 뒤치어 자신의 요 밑에 집어 넣어 죽는 순간까지 집요한 애착을 보인 물건이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문성현씨에게 창공을 향해 끝없이 날아가는 활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는 꿈을 꾸기 좋아했다. 꿈속에서 그는 걷지도 뛰지도 않고 날아다녔다. 간단했다. 바람개비만 입에 물면 그리 되었다. 계단이 많은 곳을 내려갈 때에는 그는 한 발짝이 서너 계단씩을 건너뛰었다. 그는 호수나 강, 넓은 바다 위도 스치듯이 떠다녔다. 간단했다. 한 발이 빠지기 전에 또 한 발짝을 떼기만 하면 그리 되었다. -<착한 사람 문성현> 중에서-

 

이 소설은 현실감이나 사실감이 떨어진다. 아니 등장인물 모두가 신적인 존재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형제들, 형제들의 새식구는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문성현씨를 위해 헌신한다. 독자들은 문성현씨의 내적 갈등을 제외하면 너무 밋밋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나쁜 사람이 있어야 착한 사람의 존재감이 부각되거늘 온통 착한 사람들뿐이니 긴장감도 반감되는 게 사실이다. 평생 글만 써온 저자가 이런 평범한 독자의 기호를 모르고 있었을까. 저자가 이런 설정을 한 데는 다분히 의도적이지 않았나 싶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문성현씨가 착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생존의 방편이다. 사회의 제도와 시선에 순종하고 복종해야만 탈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장애인의 삶인 것이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고난 성정은 무시된 채 시스템에 순응한 결과에서의 착함은 우리사회의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제도에 대한 역설이자 비판인 것이다. 또 문성현씨 주위에 착한 사람들만 배치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사회의 천박성을 에둘러 비판한 설정이 아닐까싶다.

 

죽음을 예감한 문성현씨가 짧은 마흔 인생을 정리한 대목은 더불어 살지 못한, 더불어 살지 않으려는 우리사회의 정곡을 찌르는 듯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못한다. 착해도 너무 착해 안타까운 수많은 문성현씨에게 일탈의 자유를 주는 것은 누구의 몫이어야 할까.

 

마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않고 성한 이들에게 얹혀 기생충처럼 살아온 사람의 삶치고는 끔찍이도 오래 세월이었다. -<착한 사람 문성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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