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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왜 나이가 들면 뽕짝을 부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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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그늘 아래서/한창훈/1995년

 

어버이 날 노래를 부르다 느닷없이 스승의 날 노래로 넘어가는 경험을 적잖이 했을 것이다. 멜로디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탓에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알아차리고는 겸연쩍어 했던 경험 말이다. 한 때 개그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요즘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예 그런 노래들만 모아서 개인기로 활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아무리 웃음을 주기 위함이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음악적 소양이 있어야 가능하련만 남편 계모임에서 가곡을 부르다 어물쩍 뽕짝으로 넘어간 음암댁의 선택은 생뚱맞기 그지 없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로 시작하는 가곡이 있다. 멜로디만 들으면 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대중적인 노래다. 그러나 그 다음 가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아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이 가곡은 박목월 작사, 김순애 작곡의 '4월의 노래'다. 아마 제목마저도 생경하게 느껴지겠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목련꽃 그늘 아래서'라는 가사만 보더라도 먼저 멜로디가 입혀질 대중적인 우리 가곡이다. 왜 이런 뜬금없는 소리를 할까 싶을 것이다. 음암댁이 그랬다. 남편 동료들의 성화에 못이겨 일어나긴 했는데 너무 긴장한 탓이었을까. 합창반이었던 여고 시절에 자주 불렀고 열린음악회에서도 심심찮게 들었건만 '목련꽃 그늘 아래서' 다음 가사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어 부른 노래가 태진아의 '옥경이'였으니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소설 <목련꽃 그늘 아래서>는 저자 한창훈 특유의 웃음코드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맛깔스런 사투리는 고단한 삶의 장면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우울하고 섬뜩한 뉴스가 TV며 신문을 장식한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묻지마 살인,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작은 다툼이 살인을 불러온 뉴스, 죽은 지 몇 달만에 발견된 어느 노인의 사연, 성추행이니 성폭행은 다반사로 등장하고 아동 학대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 뉴스는 '베르테르 효과'라는 생소한 용어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더라도 아파트라는 공간으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의 열린 사회 속 폐쇄적 일상이 원인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과민반응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뉴스라는 게 원래 나쁜 소식이 꺼리가 되기 때문이다. 훈훈한 미담도 얼마든지 있지만, 아니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더 많아 사회가 유지되고 진보하지만 뉴스꺼리가 되지 않을 뿐이다.

 

작가 한창훈이 이런 현대사회의 병폐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면서 꺼내든 소재가 바로 서민이고 농촌이다. 그의 소설에 사투리와, 은어, 비어, 속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함인 동시에 서민들의 공간인 공동체적 생활에 천착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는 여타 민중소설들에서 보이는 계급적 갈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잊혀져가는 농촌과 어촌에서 벌어지는 서민들의 일상을 가감없이 재현하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에서도 등장인물간 갈등보다는 그들의 일상에 촛점을 맞춘 저자의 글쓰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논밭이 지천으로 깔려있는 들판 너머 서해안 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한다는, 그러나 아직 변변한 백화점 하나 없어 나가봤자인, 그래서 나다니기만 성가신 도시가 가늘게 누워있고 그곳에서 튕겨져 나온 자동차들이 국도를 따라 반대편 쪽으로 줄을 잇고 있는 이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도랑을 이루도록 김매기를 하고 있는 음암댁과 지은네는 얼핏 보면 지주와 소작의 관계 같지만 사실 지은네는 음암댁의 집에서 세를 산다. 품삯을 받는 일꾼이 아니라 그저 주인집 일을 도와주는 셋방살이꾼일 뿐이다. 그러니 품삯도 마늘걷이 하면 마늘, 옥수수걷이 하면 옥수수, 맨밭일이면 그저 삼겹살에 밥 한 그릇이 일당이다. 집주인과 셋방살이꾼이지만 둘의 관계는 질퍽한 농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동료일 뿐 어디에서도 계급적 갈등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서로에 대한 사소한 질투와 시기야 사람사는 곳이면 으례 있을 수 있는 그 정도다.

 

"어이구, 그리 깔작깔작 닦덜 말고 벅벅 문질러. 그리 닦어놔야 서방이 밤마다 으리번쩍 내 물건 봐라. 광난다, 오매 좋은 거, 하지."

"이렇게?"

음암댁은 셔츠의 목구멍을 잡아당겨 생겨난 구멍 깊숙이 수건을 집어넣고 힘주어 문지르며 깔깔 웃는다. 사실 그녀는 그런 푼수를 떨 줄 몰랐다. 사철 수건 뒤집어쓰고 일할 줄만 알았지 사람 웃길 줄도 모르고 농담도 서툴렀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중에서-

 

굳이 갈등 구조를 찾는다면 음암댁이 가곡을 좋아하고 은지네가 뽕작을 좋아한다는 것. 두 인물의 음악적 취향은 도시와 농촌, 현대사회와 전통사회의 상징적 은유다. 음암댁은 타고난 농군이었던 남편을 베개송사까지 해서 9급 행정직 공무원을 만들었고 자식들의 학교성적에도 민감하다. 그 흔한 진한 농 한마디 할 줄 모른다. 반면 지은네는 남편과도 알콩달콩 사랑인지 싸움인지 모르게 살아가고 입은 걸쭉해서 숫제 민망한 줄도 모르게 질퍽한 농을 던진다. 둘은 서로에게 섭섭함은 있을 뿐 그것이 갈등으로까지 확산되지는 않는다. 음암댁에게 지은네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일손도 일손이지만 음암댁은 알게 모르게 지은네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도시에서 허연 얼굴 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맘 모를 겨."

"어, 니미. 이 넓은 땅에 저 좋은 집에 뭐가 부족해서 그래?"

"그래두 흙 파고 사는 신세가 벨수 있남."

"웃기네. 저 땅 돈이 월만디. 우리같이 세 사는 사람도 있는디. 너무 그러면 못써." -<목련꽃 그늘 아래서> 중에서-

 

소설 마지막에서 '목련꽃 그늘 아래서'를 부르려다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뽕작을 부르는 장면은 소설의 해학적인 면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고 저자의 메세지를 담아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도시적 이미지의 음암댁이 토속적 이미지의 지은네에게로 동화되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현대사회의 얼키고 설킨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토속사회의 공동체적 삶을 제시한 것이다. 지나친 개인주의 즉 이기주의가 양산하는 현대사회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공동체의 붕괴로부터 시작되었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다양한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라는 믿음일 것이다. 실제로 사회 구석구석에서 공동체적 삶을 복원하려는 노력들이 다양하게 구체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여러 대안들 중 하나가 공동체적 삶의 복원이라는 것은 다수가 공감하는 인식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보는 노래라는 말을 한다. 말 그대로 가요시장은 언제부턴가 비주얼이 대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르도 다양해져서 나이 든 사람들의 귀에는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도 많다. 그래서 뽕작을 부르는 세대는 '요즘 것들' 하며 혀를 찬다. 그런데 어쩌랴! 지금의 기성세대도 그들의 부모세대한테는 '요즘 것들' 이었으니. 부모의 부모 또 부모의 부모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꼭 존재했던 말이 '요즘 것들'이다. 한편 요즘 신세대들도 부모세대가 되면 또 그 자식세대에게 '요즘 것들'이라며 혀를 차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속사포 랩을 즐기는 신세대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뽕작 리듬에 발장단을 맞추게 될 것이다. 왜 나이가 들면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뽕작을 부르게 될까. 그저 따라 부르기 쉬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잃어버린,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 뿐만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는 토속 사회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아련한 기억 때문은 아닐까.

 

참. '목련꽃 그늘 아래서' 다음에는 이런 가사가 이어진단다.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분명 멜로디는 남아 있는데 가사가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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