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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방정환이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모험과 우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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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찾으러/방정환/1925년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이 노랫말을 눈으로만 읽는 성인은 없을 것이다. 은연중에 멜로디를 붙여 흥얼거려야 제 맛이 나는 노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가사도 멜로디도 잊혀지지 않는 노래가 있다면 바로 어린이날 노래가 아닐까.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당시 아이들은 노랫말대로 새고 냇물이었다. 학교 수업만 끝나면 산이며 들로 때로는 바다로 나가 놀다가 해가 늬엿늬엿해 지고서야 집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봄이면 올챙이 잡으러 다니다 신발과 옷은 날마다 흙투성이였고, 여름에는 멱감는 재미에 해가 떨어진 줄도 몰랐다. 가을에는 서리하다 들켜도 꿀밤 한 대로 대신했고, 겨울이면 포대자루 하나만 있으면 어디고 눈썰매장이었다. 눈에 보이는 곳은 어디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일년 내내 꽉찬 놀이 스케줄에 지칠법도 한데 그래도 어린이날은 어린이날이었다. 그때라고 엄마의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없었겠는가. 이 날만큼은 엄마의 잔소리없이 합법적(?)으로 놀 수 있었으니 손꼽아 기다릴 수 밖에. 

 

 

요즘 아이들에게 어린이날은 필자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다른 의미이지 싶다. 우리말을 채 배우기도 전에 영어를 배우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배우고 초등학교 때는 중학 과정을 미리 배워야 하니 인간의 뇌가 하나라는 사실이 서운할 법도 하다. 어디 그 뿐인가.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각종 학원을 전전하며 밤 늦게 집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고 놀아줄 친구가 없으니 학원에 보내달라고 조르는 게 요즘 세태니 과연 요즘 아이들은 노는 법을 알기나 할까 궁금하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린이날은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일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 짠해지기만 한다.

 

어제가 바로 어린이날이었다. 소파 방정환이 1922년 천도교 서울 지부 소년회를 중심으로 5월1일을 기념일로 정했으니 어린이날도 벌써 91돌이 되었다. 아동인권이란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방정환의 선각자다운 모습에 그저 경의를 표할 뿐이다. 그 사이 아동인권은 얼마나 신장되었을까. 해외 토픽으로 종종 들리는 전장에서 총을 든 아이들, 어디론가 무슨 목적으로 팔려가는 아이들, 영양실조로 배만 볼록 튀어나온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아이들을 차치하고라도 우리사회의 아동인권 또한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게 현실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라는 이름으로, 미성숙한 판단력을 이유로 자행되는 아동 학대는 좀처럼 줄어들 줄을 모른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갓난아이 시절부터 입시경쟁의 한복판에 내몰리고 있으니 아이다운 아이의 모습은 흉이 되는 세상이 되고있다. 소파 방정환이 요즘 아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본다면 가슴을 치며 통탄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방정환이 바라는 어린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어린이날을 만들었을까. 방정환이 쓴 어린이 탐정소설 <동생을 찾으러>를 통해 방정환이 바랐던 아이들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설 <동생을 찾으러>는 1925년 『어린이』잡지에 연재되었던 소설로 방정환의 많은 동화 중에서도 탐정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긴장감과 박진감, 재미를 더한 작품이다. 셜록 홈즈 못지않은 치밀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주인공 창호의 활약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까지 고스란히 담겨있으니 엄마와 아이, 아빠와 아이가 도란도란 역사에 빠져볼 시간도 주게 될 것이다. 요즘 쓰는 말로 각색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같은 어투가 또 하나의 재미라면 재미다.

 

순희의 실종으로 온가족이 동분서주 순희를 찾고 있는 가운데 순희에게서 온 한 통의 편지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오빠, 나를 좀 속히 살려 주시오. 나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 수도 없는 곳에 붙잡혀, 날마다 무서운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있습니다. 처음에 붙잡히던 날에는 학교에서 교실을 치우고 늦게야 정동 호젓한 길로 돌아오는데, 웬 기와집 앞에서 여인네가 나를 보고 "네가 순희지! 네 동무가 아까부터 너하고 같이 간다고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깐 들어갔다 같이 가려무나." 하고 자꾸 들어오라 하기에, 누가 기다리나 하고 들어가 보니까,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흉하게 생긴 사람들이 나를 꼭 붙잡아서 어두운 방에 가두었어요. -<동생을 찾으러> 중에서-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과 6학년에 다니는 순희와 창호는 남매지간이다. 순희는 청국 사람들에게 잡혀 청국으로 팔려갈 위기에 놓여있다. 창호는 순희가 공책을 뜯어서 뒷간에 가는 척 하고 편지를 써서 담 너머로 던져 누군가 주우면 우체통에 넣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창호는 편지에 써 있는 '큰 벽돌집', '청국말', '청국옷'이라는 단서로 순희를 찾아 모험을 시작한다. 마크 트웨인이 톰 소요여와 허클베리핀을 창조했다면 방정환은 창호라는 6학년 아이의 모험을 통해 몸과 마음이 튼튼한 어린이를 바랬던 것이다.

 

창호는 순희의 편지를 들고 경찰서에 가지만 단서가 충분하지 않다면 외면을 당한다. 창호는 덕수궁 근처가 큰 벽돌집이 많고 청국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점에 착안해 혼자 그곳을 샅샅이 뒤져 순희가 있는 곳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 창호에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창호는 영리했다.

 

부엌으로 뛰어들어간 창호는 거기 그냥 있다가는 금방 붙잡힐 것이 분명하므로, 문짝을 딛고 기어올라가 문설주 위로 가로질러 있는 들보 같은 나무 위에 찰싹 붙어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영리한 창호는 그놈이 사람을 찾느라고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찾되, 이 위는 쳐다보지 않으려니 짐작하고 기어올라가 숨기는 하였으나, 정작 밑에 그놈이 들어와서 성냥불을 쳐들 듯 쳐들 듯할 때에는 금방 들키는 듯 들키는 듯 하여서, 그야말로 간이 바싹 오그라들었습니다. -<동생을 찾으러> 중에서-

 

 

결국 청국 사람들에게 잡히고 만 창호.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채 청국 사람들의 폭행에 어깨는 칼에 찔린 것 같이 아프고, 머리는 땅 속으로 자꾸자꾸 들어가는 것만 같고,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리지만 창호는 그런 고통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동생 순희를 생각하면 말이다.

 

'그렇다! 내가 이렇게 쓰러져 있을 때가 아니다. 순희가 팔려 간다. 순희가 아주 팔려 간다! 내가 이러고 있으면 불쌍한 순희는 누가 구할 테냐?'

 

혹자는 <동생을 찾으러>가 빼앗긴 조국에 대한 설움과 해방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주제이지 싶다. 지나치게 어른들의 시선이 개입된 해석은 아닐지. 그저 동생을 향한 사랑과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쓴 모험 이야기만으로도 동화로써의 가치는 충분하다. 아! 우리의 창호. 창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리한 창호는 결국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지금까지의 과정을 담임 선생님에게 알리게 된다.  

 

 

방정환이 창호의 모험을 통해 몸과 마음이 튼튼하 어린이의 모습을 그렸다면 창호의 같은 반 아이들을 등장시켜 아이들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가치로 '우정'을 강조한다. 창호가 탈출하고 찾아간 경찰서에서 또 다시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순사들들은 예나 지금이나 아동인권에 무관심한 사회의 단편을 읽을 수 있다. 

 

이야기를 듣고 순사들이 큰일났다고 놀랄 줄 알았는데, 순사들은 '강아지가 자동차에 치었다.'는 일보다도 신기하지도 않게 듣는 모양이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흥! 청국 놈에게 잡혀갔으면 찾는 수가 있나? 아주 잃어버렸지……. 왜 요새 그런 일이 신문에도 자주 나는데 집에서 아이 감독을 잘 하지 않았어!" -<동생을 찾으러> 중에서-

 

순희가 청국 사람들 일당과 함께 막 청국해 기차를 타려는 순간 담임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 인천 소년회의 도움으로 순희는 물론 순희와 함께 청국으로 팔려가려던 아홉 살과 열한 살 소녀 두명까지 구출하게 되면서 창호의 모험은 막을 내린다.

 

이들이 경성역에 내릴 때, 그 할머니와 어머니, 친척들이 얼마나 즐거워할지 그것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겨 두기로 하고, 이 차가 경성역에 닿아서 가족과 친척들이 순희를 껴안고 춤추게 될 시간이 11시 40분인 것만 말해 두지요. -<동생을 찾으러> 중에서-

 

책 머리말에 소개한 <동생을 찾으러>가 '탄탄한 이야기 구성과 긴장감을 갖춘 우리 고유의 탐정소설의 고전'이라는 평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동생을 구하기 위한 창호와 친구들의 며칠 간의 여정을 통해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모험심과 상대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며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우정을 간직한 어린이에 대한 저자의 간절한 바램을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이런 저자의 간절한 바램들이 무색해지기 일쑤다. 요즘 어른들이 또는 부모들이 바라는 아이는 모험심과 우정보다는 타인과 경쟁해서 어떻게든 이겨야만 하는 그런 냉혹한 모습은 아닐까.

 

5월4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1~6세 아이들은 하루 평균 7시간을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보낸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하루 평균 30분간 학습활동을 해야 한단다. 지난 10년 동안 사교육 시간은 2배로 급증했고 여가 시간의 대부분은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다고 한다. 부모에게 안길 시간이 하루에 고작 4분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건전한 성인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면 부모와 사회의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아이들에게 어린이날은 일년 동안 부모와 사회로부터 받았던 스트레스에 대해 보상을 받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날이 지나면 다시 올 일년 후를 기약하며 부모와 사회의 압박을 견뎌내야 하니 말이다. 아이들을 향해 쏟아붓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과연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부모와 사회의 지나친 자기 만족을 위한 도구인지 어린이날도 지났으니 차분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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