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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 끝없는 애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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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고 강물 흘러/이청준/2003년

 

5년 넘게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고향에 내려간 40대 중견 작가 준섭은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각자 다른 감정으로 갈등을 겪는 광경을 목격한다. 특히 시집와서 지금껏 시어머니를 모셔온 형수는 홀가분함과 애석함이 교차되면서 그동안의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그러나 가출했던 이복조카 용순의 등장으로 어머니를 둘러싼 가족간의 갈등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상가집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게 요란한 치장을 하고 등장한 용순으로 인해 장례식장은 일대 혼란을 겪게 되는데…….

 

그렇다고 용순의 행동이 아무런 이유없이 저질러진 철부지의 그것은 아니었다. 이를 알아차린 사람은 다름아닌 준섭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따라 내려온 기자 장혜림이었다. 장례식장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용순의 행동은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할머니를 모시지 않은 삼촌 준섭에 대한 서운함에서 비롯되었다. 장례식이 시작되면서 깊어만 갔던 가족간 갈등은 장례식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풀리게 되고 용순도 장혜림이 건네준 삼촌의 동화를 읽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1996년 개봉된 안성기, 오정해 주연의 영화 '축제'는 그렇게 한 노인의 죽음을 둘러싼 가족간의 갈등이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풀리면서 장례가 끝나자 가족들은 각자의 마음 속에 노인의 순탄치 못했던 삶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역사의 변곡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왔던 민초들의 삶을 그려온 임권택 영화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 바로 '축제'다. 영화 '축제'의 원작이 이청준의 소설 <축제>라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필자는 영화 '축제'는 가물가물 기억의 언저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소설 <축제>는 읽어보지 못했다. 이청준의 소설 <꽃 지고 강물 흘러>는 <축제>의 후일담 소설이다. 어머니 장례식 이후 주인공 나와 형수의 갈등이 어머니 생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그 끝없는 애증의 관계가 오버랩되면서 느릿느릿 세월의 흐름 속에 서서히 녹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꽃 지고 강물 흘러>는 '세월이 약'이라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무념한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누구나 하나쯤 아니 무수한 질곡의 터널을 지나면서 겪게 되는 소소한 일상의 갈등들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는 결국 옛 이야기의 가물가물한 파편이 될 뿐이다. <축제>가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가족들 간의 갈등이었다면 <꽃 지고 강물 흘러>는 어머니 장례식 이후 나와 형수의 갈등으로 축소되고 구체화된다. 그 중심에는 '나'가 어머니를 위해 생전에 지어드렸던 집이 있다. 지금은 형수가 혼자 그 집에서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거기까지는 아내나 나나 비슷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발길을 끊고 싶어하는 아내에 비해 내 속마음은 솔직히 그런 식으로 쉽게 정리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예 발길을 끊고 말면 그 집이 누구 차지가 되고 마는가. 그 집이 대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지어진 집인데 누구 좋으라구……작은 오두막 한옥이나마 그 집은 애초 노인을 위해 당신의 소망에 따라 지어진 집이었다. -<꽃 지고 강물 흘러> 중에서-

 

집이 삶의 터전을 넘어 투기의 대상이 된 요즘인지라 그저그런 물욕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 '나'의 집에 대한 집착, 어머니의 집이 아닌 형수의 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는 어머니 살아생전 노인과 형수의 흔히 말하는 고부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자식으로 인해 맺어진 또 하나의 가족이지만 변변한 가장 노릇도 못해보고 주귀에 홀려 독주를 마시고 죽은 형님 탓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믿어주고 아껴주며 좋이 애틋한 소망과 아픔을 함께 해온' 사이였다. 그리도 애틋한 사이처럼 보였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이후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그런 고부 사이로 전락하고 만다. 아니 형수의 일방적인 패악(?)이었다.

 

노인의 끼니 양을 크게 줄여버린 것도 잦은 배변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형수의 불가피한 처사로 이해했고, 하루 종일 노인을 방 안에 가두고 문고리를 채워놓는 것도 바깥일을 대신해줄 이 없는 형수의 단손 처지뿐 아니라 노인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조처로 받아들였다. 형수가 전에 없이 늘 노인 앞에 큰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 어두운 청력과 망각증 탓으로 여겼으며, 그 며느리 앞에 노인이 까닭 없이 자주 겁을 먹는 것도 앞뒤 사정 못 가린 채 일상으로 저질러지는 당신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꽃 지고 강물 흘러> 중에서-

 

다시 <축제>로 되돌아가면 주인공 '나'의 형수에 대한 서운함은 용순이 '나'한테 가졌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후일담 소설이지만 전작의 갈등이 그대로 재연되는 양상이다. <축제>에서 용순이 할머니를 모시지 않았던 삼촌인 '나'를 서운해 했다면, <꽃 지고 강물 흘러>에서는 주인공 '나'가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던 형수를 원망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용순과 '나'의 원망과 서운함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할머니와 '나', 어머니와 형수의 부대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노모를 모시고 살았던 형수의 고단함은 보지 못한 채 어머니가 죽기 직전 며느리로서의 악행(?)만이 형수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가족의 해체는 가족의 탄생과 다르게 깨지기 쉬운 유리벽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용순과 '나'의 갈등이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가족간의 반목이었다면 '나'와 형수의 갈등은 인위적인 매개에 의해 탄생된 가족간의 불화라는 점에서 더더욱 파탄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나'와 형수를 가족으로 묶어 주었던 어머니와 형의 부재는 불안한 결속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나'의 형수에 반감에 비해 아내는 형수를 어느 정도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형수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의 처신도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특히 형수의 어머니에 그리움을 내보이는 말과 장례식장에서의 호곡은 그저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가 그 집을 형수가 아닌 어머니의 집으로 인식하고 어머니 집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찾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고 아재, 아이고 아재, 이 일을 어쩔 께라요. 엄니가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실 줄은 내 몰랐소. 아이고 아재……."

"아이고 엄니, 아이고 우리 엄니, 인제부터 엄니 없이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그리 훌쩍 무정하게 가시었소. 의지 없어 못 살겄소. 힘 없어 못 살겄소……."  -<꽃 지고 강물 흘러> 중에서-

 

'나'에게 형수의 호곡은 심지어 우스꽝스럽고 간특한 연극으로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장례식이 끝난 후 형수의 행동은 어머니의 흔적 지우기로 인식되었다. 도저히 해소될 것 같지 않은 '나'와 형수의 갈등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고 만다. 산밭에 나간 형수를 기다리며 낚싯대를 드리우다 시나브로 갈등의 짐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더욱이 아내가 집 안을 말끔히 치워놓은 걸 보고는 어머니를 배반한 껄끄러운 기분이 들긴 했지만 형수에 대한 원망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그 끝없는 애증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의지처였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나'는 기력이 떨어진 형수에게서 생전의 어머니를 보고 만다.

 

형수는 노인 생시의 옛날 일, 그것도 치매기가 시작되기 이전의 정의롭던 시절의 이야기를 되새기듯 하고 있었다. 언젠가 밭일 중에 그 노인의 묘소에서 당신과 함께 술잔을 나눴다고 했듯이 형수로선 어쩌면 노인 치매기 이후나 사후에도 계속 그런 심사 속에 노인과 일손을 함께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 먹음과 기력 떨어짐을 노인의 허물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부터 그렇듯 노인의 늙음과 무너짐이 아쉬워 상심해왔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 형수 또한 콩단 한 짐을 혼자 들어 이지 못하고 죽살이를 치다 애꿎게 무덤 속의 노인을 허물하고 드는 걸 보면 그 몸도 마음도 그만큼 의지를 잃고 늙어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꽃 지고 강물 흘러> 중에서-

 

저자는 주인공 '나'가 형수와 어머니를 동일시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자 했을 것이다. 결코 짧지않은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인생 속에서 아둥바둥 티격태격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들이 결국에는 도도하게 흐르는 세월이라는 강물 속에서 한 때의 부질없음으로 희석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아름답던, 얼마나 지독한 독을 품었던 꽃이라도 언제가는 지고 말 것을…….

 

이젠 더 늙지 말라고 싶은 말을 목구멍 속에 꿀꺽 삼켜둔 채 애먼 말을 하는 주인공 '나'에게서 끝내 가족일 수밖에 없는 애틋함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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