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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한국인들이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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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최일남/2003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으스름한 저녁, 맛집을 찾아 한 번쯤 발품을 팔아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고단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현대인들에게 취미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맛있는 음식에 소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만큼 희열감에 빠져든다. 게다가 어릴 적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의 맛까지 경험한다면 이내 단골집으로 점찍어 두기 마련이다. 딱히 이거다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뭐니뭐니 해도 맛집 여행의 백미는 '어머니 손맛'을 찾는 일일 것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맛집 삼매경에 빠져있다. 인터넷과 TV에서도 맛집을 주제로 한 포스팅이나 프로그램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인기 콘텐츠가 된 지 오래다. 맛집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식당이 미디어에 소개되기도 하고, 미디어에 소개된 맛집 식당이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한다. 특히 맛집을 소개할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하는 소재가 있으니 바로 어머니 손맛이다. 어머니 손맛은 맛집의 명예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처럼 여겨진다. 아무리 특출난 미각을 소유한 미식가라도 어머니 손맛이라 부르는 그 맛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고 탐닉한다. 그렇다면 어머니 손맛의 정체는 무엇일까. 또 왜 한국인들은 어머니 손맛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한국인들이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는 이유

 

최일남의 소설 <석류>는 폐렴에 걸려 죽기 전 석류가 먹고 싶다고 했던 누이와 한 겨울에 어떻게 구했는지 누이의 손에 석류를 쥐어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추억하며 음식에 담겨있는 역사성과 보수성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오랜 글쓰기 내공에서 뿜어내는 감칠맛 나는 표현들은 음식 이야기만큼이나 재미를 더해준다. 밥상머리에서 벌어지는 팔 십 가까운 형수와 시동생의 수다는 세월을 거슬러 귀엽기까지 하다.

 

보자. 그 방면의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지지조차 않는다. 이를테면 할미 김밥으로 남아 민족의 '러브미(미) 운동'을 돕고, 할미 족발은 젊은 이빨들의 저작력까지 키운다. 그것들은 대를 이어 나날이 새로운 먹성을 손짓한다. -<석류> 중에서-

 

특히 어머니 손맛의 정체와 사람들이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는 이유를 언급한 대목에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저자에 따르면 어머니 손맛이라 함은 입에 길들여진 맛이다. 어머니 손맛에 대한 단순한 정의지만 사람들이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는 첫번째 이유는 바로 할머니와 어머니의 부재다. 어머니 손맛이니 맛집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즉 근대화와 산업화 이후 핵가족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핵가족도 더 분화해서 가족 구성원 각자가 서로 다른 세대를 구성하면서 같은 밥상머리에 마주앉기란 거의 연중행사처럼 되어버렸다. 이러니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길들여졌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질수 밖에.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 손맛에 탐닉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소설 속 어머니의 '아욱국 맛있게 끓이는 법'

"물론이에요. 껍질 벗긴 줄기와 잎을 박박 주물러 느른한 기를 우선 빼야 돼요. 거기다 체로 거른 된장을 풀어 한소끔 푹 끓인 다음에 쌀을 넣어요. 동시에 불을 뭉근하게 줄여야 쌀알이 잘 퍼진답니다. 식성 따라 파 마늘을 넣기도 하고, 따로 만든 양념장을 얹어 먹기도 하는데, 마른 새우는 꼭 들어가야 제격이에요."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분히 상업성이 가미된 결과다. 변하고 또 변하는 것 투성이의 세상 한복판에서 죽어도 변하지 않는 것을 세 치 혀로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라졌던 막사발이니 뚝배기니 양은냄비니 하는 것들이 등장하는 것도 의도적이라는 것을 모를 턱이 없지만 몸의 기억력은 상술마저도 개념치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한국인들이 어머니 손맛에 열광하는 마지막 이유는 이 나라의 역사이고 음식이 이 역사의 순간순간을 채워왔기 때문이다. 이 땅의 유별난 역사. 소설 <석류>는 음식의 역사성을 통해 이 땅의 민중들이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밥보다 앞서는 이데올로기는 없다

 

요즘 '밥이 인권'이란 말을 자주 한다. 넘치도록 풍족한 세상에 밥이 인권이라니. 이 말은 요즘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응축된 표현이다. 먹거리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고, 이 땅이 너무도 좁아 바다건너 맛집으로의 여행까지 일상화된 게 현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늘도 한 끼를 걱정해야만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화려한 현대화의 속을 깨알같이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기본적인 생활비도 안되는 최저임금이지만 이런 최저임금마저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백 만이니 산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은 이음동의어일 것이다.

 

우리 음식에는 이런 민중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히 유달리 발달한 국[탕]문화도 가난했던 역사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적은 양의 식품으로 우글우글한 대식구를 먹여 살리자면 국이 아니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한편 한 밥상에 빙 둘러앉아 국물식품을 여럿이 나누어 먹는 미덕은 집단의 동질성을 확보해 주었고 참혹했던 역사의 순간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소설 속 어머니의 '총각김치 맛있게 담그는 법'

"밀가루나 녹말 가루를 섞어 파, 마늘, 생강, 고춧가루와 함께 버무린 것을 작은 항아리에 담고 간물을 잘박잘박하게 부어 익힙니다. 그러나 먹을 만하게 익자마자 금방 시어꼬부라지기 때문에 철철 넘치도록 물을 부은 자배기에 항아리를 미리 띄워야 해요. 그리고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찬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어느새 허연 골마지, 남도 말로 고래기가 낍니다. 하다가 영 못 먹겠으면 그제사 바락바락 빨아도 빨아야지. 무쳐 먹든가 국을 끓이기 위해서." 

 

어머니가 쉰 밥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고생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는 한 때 아니 지금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몰인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날인가는 지독하게 쉰 밥을 버리려는데 어디선가 득달같이 나타나 자기에게 달라지 뭡니까. 빨아서 먹겠대요. 그냥 줘버리면 될 것을 주고도 욕먹을 것 같아 거절했죠. 결국 버렸지만, 일단 밥풀로나 쓰겠다고 둘러댔어요. 아마 육이오 직적이었을 거라. 반드시 그 때문에 앙심을 더 먹었는지는 몰라도, 속으로 얼마나 서글프로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만일 그게 원인이 되어 그 양반을 해코지했다면 글쎄……하찮디 하찮은 빌미로 사상이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던 시대였으니……하고 보면 사상도 별것이 아닌 것 같애. 그런 예가 한둘인가." -<석류> 중에서-

 

짜장면이 아무리 대중화되었다고 한들 각종 애경사의 국수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우리 고유의 음식에 담겨있는 이런 역사성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역사성은 혀의 보수성으로 이어져 소위 말하는 '어머니 손맛'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누이가 석류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죽기 직전에 먹고 싶다는 석류를 구하기 위해 한겨울에 온동네를 헤매다 비록 말라 비틀어졌지만 구해와야만 했던 것도 음식에 담긴 우리만의 이념을 넘어선 정신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손맛을 찾아 맛집을 전전하는 우리는 우리 음식에 담긴 나눔의 정신을 쥐똥만큼이나 알고는 있을까. 조미료의 발달로 어머니 손맛도 기성품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기성품 어머니 손맛을 기웃거리며 국가정책의 사각지대에서 오늘도 물배를 채우며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말로만 하는 복지에 길들여져서 타인의 비루한 현실에 점차로 무감각해지고 있다. 복지? 너무 거창하게 시작할 것 없다. 굶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밥상머리에 빙 둘러앉아 하나의 국을 나눠먹는 게 우리 음식의 참맛이자 본질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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