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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춘향의 수절은 부패한 관리들의 음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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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김연수/2003년

 

경로의존성이란 개념이 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이 쓴 4월16일자 경향신문 시론 '민주당, 우열구도에 익숙해져라'에 따르면 경로의존성이란 익숙한 것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 즉 일단 어떤 경로가 정해져서 익숙해지고 나면 나중에 틀리거나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돼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 반독재 투쟁 시절 민주 대 반민주와 같은 찬반 사고의 틀에 갇혀있는 민주당을 비판한 글이다. 생각컨대 경로의존성은 비단 정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은 아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 일상에서도 이 개념은 쉽게 발견된다.

 

고전 비틀기

 

얼마 전 시사 파워블로거 아이엠피터의 글 중에 우리나라 유권자의 정치 지형도에 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아이엠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 유권자의 정치 성향을 보수:진보:중도로 구분해 보면 대략 4:3:3이라고 한다. 이 말은 보수 정권이 아무리 못해도, 진보 정권이 아무리 실정을 거듭해도 선거에서는 최소한 40%와 30%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보수와 진보의 대결은 중도층을 얼마나 흡수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변화와 개혁이 늘 기대치에 밑도는 이유라고 하면 지나친 주장일까. 어쨌든 유권자들의 어떤 경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경향성은 정치인들에게는 자기 개혁의 가능성을 희박하게 하고 무사안일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목과 대립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의 문제로 토론 부재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자기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익숙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자기 합리화와 명분 쌓기를 대화와 토론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합리적인 결론 도출이 어렵다는 데 있다.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는 차치하고라도 자신을 돌이켜보는 여유를 애써 갖지 않으려고 하는 풍토가 만연한 사회에서 변화와 개혁은 요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박제화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야 하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 형성된 대립구도가 사고의 경직성을 견고화시키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연수의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하나의 진실이 바로 하나의 진리가 된다는 명제, 갈수록 견고화되고 박제화된 사고의 틀에 작은 충격을 주는 소설이다. 저자가 주는 충격요법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고전을 비트는 데서 시작한다.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고대소설, 그 중에서도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춘향전>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기존에 알고 있었던 아니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사고의 틀에 균열을 일으킨다. 방법은 원문 텍스트와 주석의 위치를 뒤바꾸는 식이다. 즉 제목에서 '한 개의 주석'이 실제로는 원문 텍스트이고 '세 개의 이야기'는 원문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한 주석에 해당한다. 저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당연시되고 화석화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자 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사물과 현상을 보는 열린 마음을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춘향의 수절에 관한 독특한 해석

 

권선징악이라는 고대소설의 정형적인 틀과 신분을 뛰어넘은 열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소설 <춘향전>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기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남존여비의 남성중심사회가 만든 열녀 제도가 그것이다. 저자는 세 개의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춘향전>의 정형성을 탈피하고자 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춘향과 춘향을 짝사랑한 군뢰사령, 원문에서는 악인으로 묘사되었던 변사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다. 특히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등장인물과 달리 소설에서 춘향은 사랑에 눈이 먼 고집불통으로, 변사또는 정의로운 목민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군뢰사령은 이야기에 객관성을 주기 위해 저자가 창조한 인물형으로 보인다.

 

소설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감옥에서 이도령을 그리워하며 두목의 시 「금곡원」읊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진나라의 거부였던 석숭의 애첩으로 손수라는 이가 그 미모를 탐해 석숭에게 달라고 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누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녹주라는 여인을 노래한 「금곡원」. 춘향은 「금곡원」의 처음 두 구절은 생각나지만 나머지 부분이 생각나지 않는다. 「금곡원」은 춘향의 비극적 종말을 암시하는 복선 역할을 하면서 춘향이 영원한 사랑을 의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춘향이 생각해낸 처음 두 구절 '번화하던 옛일은 티끌 따라 흩어지고, 흐르는 물은 무정한데 풀은 저절로 봄이구나'는 '해질녘 불어오는 봄바람에 새 우는 소리 처량한데, 떨어지는 꽃잎은 누각에서 몸을 던진 녹주를 닮았구나'로 끝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설은 원문과 달리 변사또가 백성을 돌볼 줄 아는 관리로 묘사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런 변사또가 춘향에게 왜 수청을 들으라 했을까 궁금해진다. 또 소설이 원문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했다면 춘향의 수절에도 기존에 알고 있던 이도령을 향한 열렬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춘향의 수절에 부패한 관리들의 음모가 숨어있었다면 믿겠는가? 신임 부사가 새 부임지에 오면 기생 점고라는 것을 한다. 즉 서류상 기생 명부에 등재된 인원과 실제 인원이 일치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춘향이도 당연히 기생 점고에 참석해야 했지만 전임 사또 자제인 이도령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동안 기생 점고를 거부해왔던 것이다. 단순한 인원 점검일 뿐인데 춘향이 옥에 갇히면서까지 기생 점고를 거부한 데는 신임 부사인 변사또와 아전 사이의 힘 겨루기가 기생 점고라는 형식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춘향은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하는 변사또와 그동안 전횡을 일삼아온 남원 동헌 관리들 사이에서 수절 아닌 수절을 강요당했는지도 모른다.

 

"일이 이리 되고 보니 그놈의 치도곤도 그리워진단 말이냐? 아니면 그 허수아비의 사랑한다는 말을 진짜로 믿게 됐다더냐? 말 거슬러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잔말이 너무 많구나. 어쨌든 자네는 열녀로 수절할 몸이니 너무 좋다고 기절하지 말고 마음 하나 꼭 붙들어매도록 하게. 이번 일은 자네 한 몸 수절하는 일에 달렸으니. 자네에게 백년가약은 전임 사또 자제 책방도령뿐이 아니던가?"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중에서-

 

춘향과 변사또는 기생 점고를 두고 설전을 벌이다 결국 서로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만다. 춘향은 변사또의 노류장화(路柳牆花,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몸 파는 여자를 빗대어 이르는 말)에, 변사또는 춘향의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명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충신의 덕목을 이를 때 인용되는 말)에 발끈하고 만다. 소설 속에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변사또의 이미지는 이 사건 때문이었다.

 

"너의 그 사랑이 과연 법률과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 지금부터 우리 한번 따져보도록 하자. 어쨌거나 아직까지 너는 관기의 신분이니 관례상 수청을 들라 이르더라도 할말은 없을 터이다. 너는 오늘부터 수청을 정하는 것이니 착실히 거행하렷다!"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중에서-

 

암행어사의 출현으로 남원 동헌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일소되지만 춘향은 원문과 달리 자살을 선택하고 변사또는 홧김에 던진 '수청' 한 마디에 훗날 탐관오리로 기록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세 개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고대소설 <춘향전>의 원문 텍스트로 주석으로 소개된다. 춘향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금곡원」의 녹주처럼 열렬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변사또와 부패한 관리들 사이의 힘겨루기에 이용되면서 심약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한편 변사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남성중심사회에서 열녀 춘향을 부각시키기 위해 소설 속 그의 걱정대로 파렴치한 탐관오리로 기록되고 말았다.

 

원문에 나오는 각각의 인물에게 각인된 수절과 탐관오리의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런 이미지가 각인되기까지의 뒷이야기를 현대적 시각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저자의 글쓰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 사회를 부르짖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에 살만 붙여가는 요즈음 진정한 열린 사회의 길은 익숙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 즉 타인의 아량이 아닌 자기 부정의 용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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