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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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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후 시인의 <속수무책>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피아(彼我)의 관계를 규정짓는 속담만은 아닌 것 같다. 나와 나의 관계 즉 요즘 육체적 나와 정신적 나의 관계도 이 속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퇴화된 흔적처럼 남아있던 생채기가 자꾸 덧나기만 하니 요즘 나는 그야말로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다. 

 

속수무책

 

인도철학에 아트만(Atman)이란 용어가 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다 이 말에 필이 꽂혀 '여강여호'와 함께 온라인 상에서 자주 쓰는 닉네임이기도 하다. 비록 철학 문외한인 나에게는 '자아' 수준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어쨌든 아트만은 신체 기관과 기능의 핵심적인 동력이다. 언제부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요가라는 것도 이 아트만을 표현하기 위한 수양 방법이라고 한다. 물질이냐 정신이냐를 따지기 전에 개인 수양법으로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여겨왔는데 요즘 읽고 있는 책만큼 감흥은 없다.

 

속수무책

 

네 글자로 된 단어들은 대개 어원이 있게 마련인데 어째 이 단어는 찾기도 어렵다. 설익은 지식의 한계인지 진짜 출처가 딱히 없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속수(束手)는 손이 묶여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책(無策)은? 대책없이 하루 하루를 소비하는 삶이 그렇게도 비루한 것일까? 요즘 나처럼. <한서> '흉노전'에 이런 상황이 등장한단다. 왕망이 흉노를 공격하려하자 그의 수하 엄우가 역대 중국 왕조의 대흉노 정책을 간언했다고 한다. 엄우에 따르면 주나라는 중책(中策)으로, 한나라는 하책(下策)으로 흉노에 대응했는데 진시황은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아 재정을 고갈시키고 백성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내몰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무책(無策)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책보다 못한 게 무책이라니 이보다 더 비루한 일상은 없지 싶다.

 

속수무책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불혹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인생의 절반. 달리기를 할 때도 발이 중력의 무게를 이겨내기 힘든 지경이라도 반환점에서는 마음을 다잡기 마련이다. 또 다른 시작, 새로운 시작의 출발인 것이다. 그럼에도 애초의 시작과 다른 또 다른 시작은 어느 정도 채워진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문득 되돌아본 내 삶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아니 말라 비틀어진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깨진 환상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작은 상처만이 덩그러니 남아 곪고 또 곪아 터지고 있었다. 어느덧 불혹(不惑)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물리적 상처가 정신적 상처로 급하게 전이되는 것은 아마도 이 책 때문이리라.

 

속수무책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

 

-김경후 시인의 <속수무책>-

 

작년 12월에 받았던 『창작과 비평』2012년 겨울호를 해를 넘기고 이제야 펼쳐 보았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가 하필이면 '속수무책'. 세상에서 가장 큰 라면이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손발 오금거리는 한물간 유머처럼 내 인생 단 한권의 책이 '속수무책'이라니... 찰나의 딴생각은 '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에 와서는 요즘의 나를 제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시인의 깊은 뜻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초췌한 나의 자화상이 페이지 가득 어른거려 이내 덮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읽어본다. 이런저런 잡생각들을 끄적여본다. 끄적이다보니 몇 달을 너무도 '속수무책' 했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지워버리기로 했다.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중입니다.  

 

*김경후: 1971년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날 말이 돌어오지 않는다』, 『열두 겹의 자정』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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