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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두보와 흑달의 영화같은 한판 대결, 사랑인가 우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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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令旗)/이정환/1969 

 

요즘 대종상 영화제를 두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이병헌 주연의 <광해>가 각종 상을 독식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도둑들>, <두 개의 문>, <은교> 등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가 많았다는 점에서 <광해>의 싹쓸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매년 수상작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대중성이 작품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제마다 각기 다른 선정기준이 있겠지만 국내 영화제의 경우 대부분 작품성보다는 대중성이 우선한다는 점에서 천편일률적이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영화제 수상작 선정기준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쉬운 점은 국내 영화제도 해외 영화제처럼 작품성이나 예술성을 기준으로 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을 소개할 수 있는 영화제가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한 영화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갖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국내 영화사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중에서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영화가 아닐까 싶다. 물론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중성의 척도가 되는 그리 많지 않은 개봉관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입소문만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작품성 있는 영화가 결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을 깬 흔치 않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왕의 남자> 곳곳에 숨어있는 동성애 코드는 이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숱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이정환의 소설 <영기>를 읽어본 독자라면 영화 <왕의 남자>를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영화도 소설도 감독과 작가의 의도는 따로 있었겠지만 사랑인지 우정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두 남자의 관계는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영화 <왕의 남자>에 장생과 공길이 있었다면 소설 <영기>에는 두보와 흑

달이 있다. 두보와 흑달의 영화 같은 한판 대결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한판 대결

 

소설 <영기>의 백미는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한때 같은 남사당패의 꼭두쇠(두목)와 부두목이었던 두보와 흑달의 손속 대결이다. 두보와 흑달 두 사람은 그야말로 상모와 장구의 달인이다. 상모를 돌리다 사람 몸뚱이만한 나뭇가지에 걸리면 상모가 끊어지는 게 보통이거늘 두보는 큰 가지를 땅에까지 연하게 휘게 하고 상모를 살아있는 뱀처럼 스르르 풀리게 할만큼 재주를 가진 수버꾸(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남사당패 단원)였고 흑달의 장구는 그가 장구를 치는 옆에 섰던 사람이 넋을 놓고 구경하다 집에 돌아갔는데 며칠이 되어도 장구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아 다시 흑달을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하니 흑달이 맨손으로 장구를 치자 그 사람의 귀에서 장구 소리는 떠나고 적만한 바람소리가 나더라는 귀신장구였다. 이만한 고수들의 대결이니 구경꾼들 눈에는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두보와 흑달이 각자 조직의 운명을 걸고 한판 대결을 벌인 데는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남사당패의 두목과 부두목이기 전에 오래 전부터 동모(남편)이얏동모(아내) 사이였다. 동모와 이얏동모는 여자가 없는 남사당패에서 고적한 객고를 달랠 양으로 서로 짝을 찾아 생활하는 부부나 다름없는 기습(氣習, 집단이나 개인에게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습성이나 습관)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두보가 세속의 사랑을 하고 만 것이다. 점례를 아내로 삼아 장모 얼레댁과 함께 남사당 패거리로 끌어들인 것이다. 한편 점례와 얼레댁은 남사당패 재주를 배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흑달은 점례와 얼레댁을 비롯해 쓸만한 뜬쇠(남사당패에서 각 기능의 부장격)들을 죄다 빼돌려 걸립패(경비 마련을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려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기 위해 만든 조직)를 만들고 말았다. 두보에게 이제 남은 패거리라곤 가열(뜬쇠 밑에서 재주를 익힌 사람들)삐리(재주를 배우는 초보자)들 뿐이었으니 두고두고 이 치욕을 씻어보리라 마음먹었던 차에 그 날이 온 것이다.

 

소설은 두 고수의 대결을 이렇게 표현한다.

 

어느 때는 황새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도 같고 어느 때는 두 마리 이무기가 구름을 얻어 하늘로 승천하는 것도 같고 때론 무사시대의 용맹한 무사가 칼날을 번득이며 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짓쳐나가는 것도 같았다. 열두 발 백사가 꿈틀거리는 것도 같고 어느 잘 추는 칼춤이 저러랴 싶은 것이다. -<영기> 중에서-

 

그러나 두 고수의 한판 대결은 두보의 죽음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전부터 신병을 앓고 있었던 두보가 대결을 펼치던 중 검붉은 거품을 토해내며 죽고 만 것이다. 두보가 숨을 거두기 직전의 묘사는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로 장엄하고 숙연하다. 두보는 진양조에서 시작해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휘모리로 속도를 내면서 땅에 주저 앉았다. 신기의 여운으로 한참이나 돌아가는 상모를 보고 있던 구경꾼들은 그때까지도 두보가 죽은 줄은 모르고 있었다.

 

두보와 흑달의 대결이 단순히 배신감이나 증오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두보의 죽음 앞에서 망부처럼 곡을 하며 섧게 우는 흑달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애초에 대결을 먼저 요청한 측도 흑달이었다는 점에서 손속 대결을 통해 용서와 화해의 손을 미리 내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보도 만찬가지다. ‘두보의 눈에선 분노와 괴로움이 범벅이 되어 파란 빛이 감돌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복수가 아닌 흑달을 향한 애증을 대결을 통해 쏟아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이면 어떻고 또 우정이면 어떻겠는가. 오랜 세월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두 남자의 원망과 시기와 질투를 예술로 승화시

킨 한판 대결은 우리네 성정의 가장 자연스런 발로로 아닐까 싶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독자의 관심이 두 남자의 흔치 않은 사랑과 질투 그리고 원망과 화해로 치우쳐 있는 동안 저자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근대화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던 1960년대, 근대화와 도시화가 마치 선()인 것마냥 옛 것은 고리타분하고 버려야 할 인습으로 치부되던 시절, 남사당패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상징적 소재하고 할 수 있다. 두보와 흑달의 사랑과 질투는 옛 것과 새 것, 전근대와 근대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때 민중문화의 대표격이었던 남사당패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신파극단이나 곡마단, 서커스 등에 밀리면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새로운 민중문화의 출현은 강요된 근대화로부터 소외된 민중들이 삶의 한 자락을 놓치 않으려는 몸부림의 표현이기도 했다.

 

남사당의 단조로운 풍악과 연희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이들 걸립패의 고사와 덕담에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찌뿌드하게 무겁고 허전한 실의와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은 고사의식이 강하고 탈춤을 잘 추는 걸립패에게서 무너져가는 것들의 공통성을 피아간에 더듬고 서로들 부축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기> 중에서-

 

그렇다면 사라질 운명에 처한 남사당패는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근대화라는 명목 하에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민중들에게 남사당은 애틋한 고향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삶과 생존의 근거와도 같은 것 말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비루한 삶의 중간중간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들,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고목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삶의 근원이 되는 것. 저자는 이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두보 행중의 어린 두 삐리의 대화를 소설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한다.

 

두보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알았던 새미는 두보의 장례식 전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남사당패를 떠날지 고민하게 되지만 제 발로 행중을 찾아온 판쇠는 두보의 죽음과 함께 흑달 걸립패에 흡수된 두보 행중을 상징하는 영기(令旗)를 계속 들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너 지금부터 어디로 갈래?”

나도 모른다. 엄마를 찾아갈까 할매를 찾아갈까……

너 무동 잘 서더라. 내 짝패를 구할 테니 나하고 이 영기 가지고 돌아다녀보자. 어떠니?”

네깐 거지가 뭘 할 줄 알아서……

뭣이?!” -<영기> 중에서-

 

이 두 어린 삐리들이 근대와 맞설지, 아니면 근대에 순응해서 살지는 해사한 얼굴의 화주 어른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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