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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펌] 국어는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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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만들자는 국민 여론이 높았지만, 올해도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은 채 지나갔다. 아쉽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이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국경일이라면 한글날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국경일이자 문화민족으로서의 품격을 되돌아보게 하는 날이다. 공휴일로 지정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우리말이나 한글에 대해 국어운동계에서, 그리고 언론에서 붙이는 그 수식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계가 경탄하는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 ‘한류의 뿌리이자 국가 브랜드’ 등의 말에서 민족주의 냄새가 너무 강해서일까? 물론 내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 이유가 필요하지 않듯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일에도 이유는 필요 없다.

 

내가 걱정하는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떠벌이 민족주의다. 그런 민족주의의 밑바닥에는 다른 민족에게 피해를 받았으니 이젠 복수하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일종의 광기와 맞닿을 위험이 있어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세계문자올림픽이라는 행사가 기독교 선교의 목적이라고 의심받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맞닿아 있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를 똑바로 보는 데에 방해가 된다. 우리네 말글을 잘 다듬는 일은 민족문화 발전이라는 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시야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넓히고 싶다. 어떠한 시민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무에서 배제당해선 안 된다. 여기서 언어가 중요하다. 정치나 행정의 절차, 또는 참여기회에 구멍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공적인 언어의 측면에서도 문제를 봐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의 사례로, 올 3월부터 5월까지 고용노동부가 냈던 보도자료를 분석해보니 양해각서를 뜻하는 ‘MOU’라는 영어 줄임말이 24번이나 나왔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연구·개발을 뜻하는 ‘R&D’가 43번이나 나왔다. 자판을 칠 때조차도 한글에서 영문으로 전환하여 대문자를 치고 다시 한글로 전환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생각하면 그다지 경제성이 있는 짓도 아니다. 그런데도 죽어라고 이 말을 쓴다.

만일 국가가 규정한 의무교육을 마친 시민 가운데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는 그 정책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어떤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옆사람에게 슬쩍 물어보면서 자신의 무식을 한탄할지도 모른다. 작은 일이지만 굴욕이다. 보도자료가 이 정도라면 각종 알림글은 오죽하겠는가? 서울시 서초구청은 민원부서 이름을 ‘OK민원센터’라고 짓고 특허까지 냈다고 자랑을 하니.

공문서를 이렇게 작성하는 일은 2005년에 만들어진 국어기본법을 위반하는 범법행위지만, 공무원 가운데 이 법을 알고 있는 이조차 드물다. 국어기본법은 우리말과 한글을 공무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규정하고 있고 공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한글로 표기하되 어쩔 수 없을 때에만 괄호 속에 외국어나 한자를 넣어 이해를 도우라고 정하였다. 국어문화의 발전이라는 목적도 있겠지만, 사회 전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의 정신 위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력과 대중문화가 세계인에게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마당에 한류나 한국어 세계화를 깎아내릴 마음은 전혀 없다. 하지만 수출 대기업의 금탑 뒤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중소기업이 신음하고 있다. 양극화는 경제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세계의 관심 뒤편에서 한국인의 언어 인권이 가려지고 나날이 뒷걸음칠까봐 걱정이다. 언어 문제를 세계화와 민족의 틀로만 보지 말고 인권의 잣대를 대야 할 때다.

-이건범/출판기획자·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 <출처: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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