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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비상을 꿈꾸는 당신, 중력과 맞서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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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로 가는 사람/김승희/1994년

 

F =Gm1m2/R2

F: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 G: 중력상수, m1,m2: 두 물체의 질량, R: 두 물체 사이의 거리.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고, 물체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은 만고의 진리였다. 근거는 없지만 종교적 믿음과 다를 게 없었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급한 과학적 영감을 얻기 전까지는. 그것은 바로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 중력 때문이었다. 김승희의 소설 <산타페로 가는사람> 전편에서 독자는 '중력'의 압박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한편 '중력'의 압박은 '비상'이라는 탈출구를 향해 젖먹던 힘까지 쏟아내게 한다. <산타페로 가는 사람>의 대결구도는 '중력'과 '비상'이다. 저자가 양자의 대결구도를 통해 힘겹게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의 작은 도시 이블린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한 '나'는 지역 신문인 『데일이 이블린』 1면에 실린 남자 무용수(발레리노)의 완전한 스윙 동작을 보고 문득 '중력'을 떠올린다.

 

두 다리를 날씬하게 하늘로 접고 황금빛 어깻죽지에서 나비의 힘 같은 가벼움이 솟아오르는 남자 무용수들의 얼굴에서 나는 하염없는 행복과 무게를 뛰어넘는 자의 흘러넘치는 영광을 느끼고 전율한다. 우리는 모두 중력에 굴복하는 무거운 사람들이 아닌가? -<산타페로 가는 사람> 중에서-

 

'중력'은 일상에서 무수히 경험하는 압박이다. 아니 '나'에게 일상은 압박 그 자체다. 여성으로서의 압박, 어미로서의 압박, 딸로서의 압박,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압박, 아픈 역사에 대한 원죄의식을 가진 주인공 혹은 관찰자로서의 압박 등 삶을 지배하는 어두운 그림자다. 마치 휴전선처럼 인간을 평화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휴전선이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의 '중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나'에게 비탄의 근원은 가족이다. 가족은 '나'의 원천인 뿌리다. 

 

우리 생전에 언젠가 또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에서 이런 자유로운 시간을 다시 가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에 돌아가면 누구나 자기 현실 속의 직업인으로, 어머니로, 아내로, 자기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다시 자기 나사의 원래 위치로 돌아가 나사 맞추기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력에의 복종. -<산타페로 가는 사람> 중에서-

 

저자의 고민은 뿌리라는 가족에서 비롯되지만 단순히 일상에서 그치지 않는다. 광주에 대한 원죄의식에서 비롯된 역사와 휴전선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가족이라는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모든 정보가 파편화되고 모든 사건이 이미지화 되는 정보화 사회에서 부유할 수 밖에 없는 개인들의 일상과 "검열당하는 자는 검열관을 닮고, 억압당하는 자는 억압하는 자를 닮는다"는 말처럼 자기검열과 상업주의 검열이 판치는 우리사회에 대한 냉정하고 냉철한 자각이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휴전선의 존재는 또 그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휴전선 증후군은 안정된 평화를 항상 낯설게 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불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곡된 현실과 싸우는 것보다 안전선과 휴전선 뒤에 몸을 숨기는 가장 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산타페는 자유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일상의 억압이 있기 전 무한자유의 세계. 문명이 오염시키지 않은 순수 원초의 미를 가지고 있는 곳. 즉 원시, 근원, 원색의 시원기가 있는 억압 이전의 삼원색이 있는 곳이 산타페다. 일상의 억압을 탈출해서 비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산타페가 아닐까. 그러나 무한자유의 세계는 다름 아닌 현실도피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우선 고통받고 있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일상의 억압을 제공한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지만 산타페로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뿌리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뿌리의 재발견인지는 독자 각자의 몫일 것이다. 

 

내가 집에 차압이 오느냐, 마느냐? 하는 저주스런 신용보증보험 문제로 그토록 고통에 빠져 있을 때 바로 나의 옆방에서 이렇게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들 모하마드의 용기를 찬탄하고 부러움의 머나먼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먼 곳에 있다. 그녀에겐 산타페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순식간에 심한 허기에 빠져드는 것 같다. 안전선을 부수고 스스로 전쟁이 된 여자의 용기. -<산타페로 가는 사람> 중에서-

 

결국 산타페로 가기를 거부한 '나'는 스스로 긍정의 힘을 만들어간다. 가족에서 비롯된 '중력'의 압박을 가족 때문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나의 근원인 가족이 있는 곳으로의 복귀는 현실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지이기도 하다. 발레리노의 비상에서 느꼈던 아름다움은 발레리노의 처절한 중력과의 투쟁으로 인식전환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희미한 상점 불빛 아래로 신문지며 낙엽이며 비닐봉지 따위가 바람에 무섭게 휩쓸려 다니는 것을 본다. 어떤 신문지는 마치 생물인양 퍼덕거리며 회오리를 타고 하늘로 막 올라가기도 한다. 술 취한 남자가 저 모퉁이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센 바람에 비틀거릳니 벽에 딱 하고 이마를 묻고 두 손으로 벽을 의지한다. 바람벽이 때로는 중심을 잡아주기도 하는구나. 다시 한 번 바람이 회오리를 그려 비닐봉지며 신문지며 가랑잎들이 공중곡예를 하는 듯 붕붕 뜬다. 나는 아침 신문의 남자 무용수의 나는 모습을 회상하고 그것이 아름다웠던 것은 중력과 싸우는 힘을 스스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다. 중력. -<산타페로 가는 사람> 중에서-

 

산타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비상을 꿈꾸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는 산타페는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일상이건, 사회적이건, 정치적이건 억압의 굴레 즉 중력의 압박을 피해 안전선을 설정하고 왜곡된 산타페로 가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의 억압과 맞서 싸우다 지친 나머지 자기검열을 통해 권력과 자본이라는 무한자유의 산타페로 간 언론인들도 많고, 변혁의 원대한 꿈을 꾸다 반역의 물결에 합류한 정치인들도 부지기수다. 이들은 중력과 싸우는 힘을 스스로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변절하고 스스로 안전선을 만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왜곡된 산타페행을 선택한 지식인들 때문에 억압된 일상 대신 무한자유의 세계, 무한자유의 산타페, 자살을 택한 이들도 한 둘이 아니다. 짓누르는 중력의 압박에 하루하루 쪼그라드는 일상들이 비상의 꿈을 접고 있다. 그러나 일상의 억압을 이겨내는 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가족, 나의 근원이 되는 뿌리. 비상이 아름다운 발레리노가 중력과 싸우는 힘의 근원도 그 뿌리에서 왔으리라.

 

뿌리 있는 것은 결코 완전히 흔들리지는 않는다. 어두운 밤하늘의 색채가 정선아리랑을 부르는 것 같다. 나의 발끝에서부터 실뿌리가 돋아나는 것 같고 마구마구 하늘의 색채를 먹어 나무의 몸통처럼 나의 몸이 우뚝 서는 것 같다. 아아, 집으로 가야지, 부디…… -<산타페로 가는 사람> 중에서-

 

비상을 꿈꾸는 당신, 중력과 맞서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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