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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화가와 창녀와 현대 도시인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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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향기/채영주/1993년

 

내가 아는 물고기들은 그런데 대체로 외롭다. 특히 아름다운 태국 버들붕어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다가 동일한 족속의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들은 온몸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정열의 불길이 지느러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간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대안이 있을 뿐이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 상대방을 죽이느냐 혹은 화려한 사랑행위를 시작하느냐,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싸움으로 상대가 죽어도 그들은 혼자가 되며 사랑이 끝나도 수컷은 암컷을 쫓아버린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라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현자들인 것이다. -<도시의 향기> 중에서-

 

지독하리만치 '절대고독'에 집착하는 이가 있다. 그는 해양 수족관 개관 기념식 때 구입한 사진 속 칠십 센티 남짓의 몸통을 바위틈으로 내밀고 있는 아주 커다란 바다장어에 외로움을 빌려주기 위해 하루 종일 가장 외로운 물고기를 찾아 돌아다닌다. 도대체 별 희한한 사람 다 있지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가지는 직업의 일이기도 하다. 그는 화가다. 예술가에게는 타협보다는 집착과 고집을 요구받는다. 예술적 창의성은 바로 이 집착과 고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절대고독'을 꿈꾸는 이 젊은 화가에게 예상치못한 라이벌이 나타났다.

 

 

채영주의 소설 <도시의 향기>는 주인공 '나'의 새로 입주한 어느 오피스텔에서 낯선 이웃집 남자 '그'와의 갈등을 통해 예술적 집착의 비극적 결말을 그리고 있다. '나'에게 예술은 고독의 세계로 통하지만 예술의 활동 공간인 현실은 절대고독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나'의 예술에 대한 집착은 현실과의 싸움에서 예술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인 충동'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주인공 '나'를 통해서 단절된 현대인의 고독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피스텔이 주는 단절과 불통과 고독의 이미지는 소통의 상징 전화의 반전적 의외성으로 그 상징성이 퇴색되기도 하지만 아파트와 함께 현대인의 고독을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화가인 '나'는 나만의 예술세계를 만들기 위해 오피스텔로 입주한다. 그러나 '나'의 예술에 대한 집착은 지독한 이기주의적 형태로 나타나고 만다. 소설에서 갈등의 결정적 매개가 된 전화도 주인공 '나'에게는 '내가 누군가의 번호를 누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불통을 해소시켜주는 본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전화가 현대인에게 또 다른 고독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설정이 의외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밖에 없다.

 

절대고독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나'의 집착은 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에게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피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신고하는 냉정함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나'에 여자란 쾌락의 대상일 뿐 쾌락의 일상화(결혼)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가진다. 왜? 내가 그림에 열중할 수 없으니까.

 

물론 그녀의 제의는 유혹력이 있었다. 그러나 내 속에는 또 다른 한 인간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었다. 내 삶에는 애당초 인간들에게 할당된 부피가 있었다. 그런데 그 피부는 나 자신만으로도 이미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도무지 또 한 사람을 구겨 넣을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주 냉정하게,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네가 원한다면 가끔 나를 만날 수는 있어. 술도 같이 마시고 잠도 같이 잘 수 있어. 내가 구태여 그런 말을 한 것은 내게도 아주 가끔은 그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정액이 배꼽까지 차오르면 어딘가 쏟아 부을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향기> 중에서-

 

 

그러나 '나'의 이기적인 예술에 대한 집착은 옆집 남자 '그'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나'의 고독한 이미지와 다르게 '그'는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그'를 고독한 현대인의 대안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 또한 어찌어찌한 이유로 자기만의 고독한 공간을 구축하고 사는 현대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독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현대 도시인과 달리 '그'는 최소한 소통에 대한 일말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 뿐이다. 주인공 '나'와 분란의 원인이 되었던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도 '그'에게는 외부와 소통하고 있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최소한이었으니까. 그가 전화선을 뽑지 않고 지겹도록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난 자네하고는 달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게 내 체질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러지를 못하니 전화벨 소리라도 들어야지. 이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구나 생각하며." -<도시의 향기> 중에서-

 

'그'의 직업은 성매매 관련된 일이다. '그'는 '나'에게서 창녀의 이미지를 본다. '그'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인 창녀와 화가의 공통점은 자기만의 절대공간을 구축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갈등은 급기야 폭력으로까지 비화되고 '그'의 폭력성은 '나'에게 나의 실체를 보게 해주는 상징적 장치로 볼 수 있다. '그'에게 처참한 폭행을 당한 '나'는 거울을 통해 '낡은 얼굴에 메마른 몸매는 내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인물'이라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기주의로 변질된 예술적 집착과 그로 인한 절대고독으로 미처 보지 못했던 '나'의 본질적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나'에게 절대고독이 해체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애인 경희가 절실하게 보고싶어진다. 

 

'그'가 '나'의 여자 경희와 미국으로 이민간다는 다소 엉뚱한, 개연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소설의 결말이 황당하기는 하지만 소통하지 못한 예술적 집착의 타락과 이로 인해 보여지는 단절된 현대인의 고독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마련'이라는 새로운 모색을 생각하게 한다. 

 

아파트, 오피스텔, 원룸 등에서 죽은지 꽤 되어 부패한 상태로 발견된 시체나 심지어 백골 형태로 발견된 시신과 관련된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그게 꼭 뉴스 속의 일만이 아님을 무섭게 직감하게 된다. 소통의 부재는 단절로 이어지고 단절은 고독이 되어 자신만의 고독한 절대왕국을 견고하게 구축해 나가는 것이 현대인, 현대 도시인의 비루한 삶인지도 모른다. 누구는 현대산업사회의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왜곡된 현대사회의 모순에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동물적(?)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날 선 회색빛 아스팔트 악취와 사람끼리 부대껴 퍼지는 악취 중 인간의 오감 깊숙한 곳에 고향처럼 자리잡은 도시의 향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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