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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우리말도 일본말도 아닌 외계어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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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작명소 ‘좋은이름연구원’의 송학 선생은 고희의 연세에도 후학 양성을 위해 이름 하나로 30년 외길 인생을 살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강의하고 있다. 공부를 하러 찾아오는 이들은 이미 작명소나 철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대단한 학자들이다. 그러니 이들이 이름을 지을 줄 몰라 5개월이 넘는 시간을 작명 공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이름을 제대로 짓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것이다. -2012년 7월27일, 중앙일보 '사람의 인생을 설계하는 이름, 신중하게 결정해야' 기사 중에서-

 

Q. '도둑들', '베를린'을 보면 집중적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원톱 주연도 아니고 비중도 작다.
A. 비중은 중요치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착 달라붙는 느낌이 있었기에 기대가 됐다. 게다가 최동훈 감독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흥행 감독이고, 또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나오니. 내가 모자란 부분도 채워줄 것 같았다. 마치 모든 것을 다 갖춘 느낌이 들었달까. -2012년 7월27일, SBS E뉴스 '대도(대도)된 전지현, 관객의 마음을 훔치다(인터뷰①)' 기사 중에서-

 

위에 소개된 두 기사에는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순우리말은 아니고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고 있는 한자어다. 쉽게 찾는 방법은 두 기사에서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를 찾으면 될 것이다. 물론 필자가 이미 알고 있어서 내는 문제는 아니다. 필자도 오늘 처음 알았으니 문제 푸는 부담감은 갖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말에 대한 상식이나 지식이 없어도 눈치가 좀 빠르다면 금방 찾아냈을 것이다. 정답은 '기라성'이다.

 

정기구독하고 있는 월간 《책과 인생 2012년 8월호가 어제 도착했다. 누구나 그렇듯 잡지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목차만 보고 훑어보기에는 너무 심심해서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스쳐가는 사진과 함께 읽을 부분을 찾곤 한다. 오늘은 사진도 없고 단지 제목만 굵은 파란색 쓰여졌을 뿐인데 눈에 금새 들어왔다. '기라성綺羅星' 바로잡기를 왜 '체념諦念'하지 않는가.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국어연구가 미승우의 글로 단순히 흥미로 읽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커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말도 일본말도 아닌 외계어 '기라성'이

국어사전에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풀이를 하자면 '기라성''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이라는 뜻으로 '신분이 높거나 권력 또는 명예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죽 늘어선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한자를 풀어보면 국어사전에 있는 '기라성'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뜻으로 해석되고 만다. '기라綺羅''아름다운 비단옷'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성星'을 붙이고 뜻을 따져보면  '기라성''아름다운 비단 별'이 된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아름다운 비단 별'은 분명히 다른 의미다. 위의 두 기사 '기라성'에 각각 다른 뜻풀이를 넣고 읽어보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라성'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고 국어사전에도 있는 뜻과 한자 뜻풀이가 전혀 다른 말이 돼버리는 것일까. 저자는 일본의 국어사전을 베낄 때에 잘못 베낀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일본말의 '기라호시'를 잘못 번역해서 생긴 오류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일본어 발음으로 '기라'에 해당되는 단어가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가 쓰는 '기라綺羅''반짝반짝 빛난다'는 뜻으로 쓰는 '황煌'이다. 두 단어 모두 일본말로 '기라'라고 발음한다. 참고로 '별'을 의미하는 '星'의 일본 발음은 '호시'이다.

 

'기라성騎羅星'을 일본말로 읽으면 '기라호시'가 되는데 일본에는 '기라호시'란 말은 있지만 한자로 '騎羅星'이라고 쓴 '기라호시'는 없다고 한다. 일본말 '기라호시'의 한자는 '煌星'이지 '騎羅星'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짝반짝 빛난다'는 뜻의 일본말 '煌星기라호시'를 베끼는 과정에서 '煌기라''騎羅기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무수히 많은 별'이라는 의미로 쓰고있는 '기라성'이 실제 한자 뜻풀이로는 '아름다운 비단 별'이 돼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말도 아니고 일본말도 아닌 외계어다.

 

'뛰어나게 뚜렷한 존재'라는 뜻의 '기라성'에 해당하는 우리말에는 '샛별'이나 '살별'이 있다고 한다. 도 있다. 일제교육을 받는 세대들의 무분별한 일본말 차용이 후세들에게는 문화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영화제가 끝나면

제사라도 지내나보지? 체념해 보자

 

자존심 상할 단어가 하나 더 있다. '체념諦念'이라는 말이다. '체諦'라는 한자어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諦''살피다'라는 뜻이란다. 예를 들어 '諦思(체사)'는 '살펴 생각하다'라는 뜻이다. 반면 일본에서 '체諦''포기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체諦' 뒤에 '생각'이라는 의미의 '념念'을 붙여 각각 해석해 보면 우리말로는 '살펴 생각하다'라는 의미가 되고 일본말에서는 '생각을 포기하다' , '단념하다'라는 뜻이 된다. 즉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체념諦念'은 일본말이라는 결론이 된다.

 

여기까지만도 충격적인데 '음악제'니 '영화제'니 하면서 축제를 즐기는 상상을 하는데 원래 '제祭'라는 한자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를 뜻한다는 대목에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한자어 '제祭''백신百神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라고 한다. 똑같은 한자어인데도 일본에서 '제祭'는 '제사'가 아닌 '잔치'를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제祭'에 담긴 우리의 사상과 얼 대신 일본인들의 그것을 빌어쓰고 있는 것이다. 

 

'기라성綺羅星' 바로잡기를 왜 '체념諦念'하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정확한 해석은 잘못된 우리말 바로잡기를 포기하란 말이 아니라 바로잡기를 살펴 생각하라는 말이다.

 

수필만치 짧은 글이지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다. 여전히 진행중인 과거청산, 특히 친일청산은 인적청산만을 그 목적으로 둬서는 안된다. 35년의 압제 속에 사라진 우리문화, 우리정신의 복원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놔두고 식민시대의 일본말이 아직도 삶 구석구석에 살아있는 현실, 우리말보다는 외래어를 많이 쓸수록 스스로가 높아보이는 현학적인 태도들, 아름다운 우리말이 사장되도록 방치하고 있는 교육은 결국 문화 예속의 출발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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