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어떤 날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반응형

몰개월의 새/황석영/1976년

 

하얀 것이 차 속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주워 들었을 적에는 미자는 벌써 뒤차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 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어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몰개월의 새> 중에서-

 

누구는 인생을 살만하다고 하고, 누구는 인생을 마지못해 산다고 한다. 살만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고 또 마지못해 산다는 말은 또 어떤 뜻일까. 누가 삶의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겠느냐마는 그래도 인생의 어느 자리에선가 문득 이런 의문쯤은 품어봤을 것이다. 인생은 그저 알맹이만 포식하고 버려져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콩깍지에 불과하다고 자조하는 사람들에게 작가 황석영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황석영은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던 작가다. 그의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이 전쟁체험을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의 숨겨진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였다면 1976년 발표한 단편소설 <몰개월의 새>는 참전을 앞둔 어느 젊은 장병을 통해 삶과 인연의 소중함을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포항 어디쯤에 있다는 몰개월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과의 시시한 인연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때로는 연민이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이들의 삶은 너무도 위태위태하다. 

 

참전은 곧 죽음이라는 등식 앞에 나를 찾으려는 주인공 하상병이 무단이탈로 다녀온 서울의 하룻밤은 그래서 더욱 비장하고 절박하게 보인다. 그에게 인생이란 더이상 가치없는 무엇이 되어버렸지만 어딘가에 남아있을 자신의 흔적이라도 발견한다면 그에게 인생은 또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세상에 그렇게 친절한 전쟁은 없다. 그가 찾은 서울은 이미 미친년처럼 얼룩덜룩하게 화장한 육십 년대의 축축한 습기가 배어있는 곳에 불과했고 자신이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은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았다.

 

한참이나 역 광장을 맴돌았다. 먼저 어디로 가서 나를 만날 것인가. 내 흔적이, 내 그림자가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가족들의 식탁 뒤편에서 앓고 있다가 방금 일어나 끼어든 환자처럼, 도시의 활기가 어쩐지 분했다. 전화를 걸었다. -<몰개월의 새> 중에서-

 

저자의 의도적인 설정일까. 1973년 <삼포 가는 길>의 백화는 1976년 <몰개월의 새>에서 미자로 등장하니 말이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술집 작부인 그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에는 다시 찾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룻밤 남자들에게 그녀들의 삶을 송두리째 주고만다. 그녀들은 성녀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녀들의 삶을 사는 것뿐이다. 하상병이 애인이라며 면회까지 온 미자에게 사랑 대신 연민을 느낀 것도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투쟁의 대상인 삶이 누군가에는 그저 시시하고 무의미한 그것으로밖에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이 까무룩 하다가 잦아든 다음에 나는 은근히 조바심이 나서 빠꿈이를 건드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손짓만 그럴 뿐이지 몸에 도통 기별이 가지 않았다. -<몰개월의 새> 중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으로 긴 여운을 주는 것은 파병을 앞두고 전쟁은 죽음이라며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던 하상병이 막상 전쟁의 한복판에서는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하는 경험을 하고서 비로소 세상에 시시해 보이는 어떤 삶에도 그 당사자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것은 비록 명분없는 전쟁이지만 타국에서 죽어간 이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저자의 호소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는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다. -<몰개월의 새> 중에서-

 

소설 속 몰개월은 경계이자 장벽이다. 파병을 앞둔 하상병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며 술집작부 미자에게는 평범함과 특별함의 경계다. 또 경계를 넘어설 수 없게 하는 장벽이 몰개월이라는 공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장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비록 천박하다며 손가락질을 받을망정 살아가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순간들이다. 비상할 그 날을 꿈꾸며....

 

알다시피 소설의 배경은 베트남 전쟁 파병 하루 전날의 일이다. 그러나 소설 어디에도 전쟁만 있을 뿐 '베트남'은 빠져있다. 짐작컨대 저자의 의도적 누락이지싶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전쟁의 명분은 호전주의자들의 자기변명일 뿐 전쟁은 인간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리는 가장 흉칙하고 잔인한 괴물에 불과하다. 전쟁은 전쟁일 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