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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그리스

아폴론의 금지된 사랑에서 유래한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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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졌네."

 

죽음 앞에서 이렇게 태연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의술의 신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병이 치료되면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독배를 마시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 제자들에게 했다는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병의 치유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삶이란 병이다. 죽음은 곧 삶이라는 질병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며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불과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보여주는 역설적 유머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영혼은 불멸하며 죽음이라 가장 순수한 영혼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백조에 관한 짧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분명 자네들은 나를 백조만 못한 예언자로 여기는 것 같군. 백조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들의 주인인 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됨을 기뻐한 나머지 평소보다 더욱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데 말일세. 인간들이 백조의 마지막 노래를 죽음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 여기는 것은 큰 잘못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지닌 죽음에의 두려움으로 인해 제비나 오리나 꾀꼬리나 그 밖의 어떤 새를 막론하고 춥거나 배가 고프거나 고통스러울 때에도 결코 우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네.

나는 절대 백조가 슬퍼서 우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네. 아폴론 신의 사자인 백조들은 예견력이 있어. 저 세상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여러가지 좋은 일들을 미리 알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네. 그러므로 백조는 죽는 바로 그날 여느 때보다 더욱 행복하게 노래하는 것이라네." -플라톤의 <파이돈> 중에서-

죽음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는 소크라테스 바로 자신인 것이다. 사람이 백조가 될 수 없으니 이 말의 진실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이 이야기를 한 데는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백조에 관한 신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퀴크노스, 백조(Cygnus)로 환생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은 가장 다양한 신으로 등장한다. 태양의 신, 궁술의 신, 음악의 신, 의술의 신 등은 모두 아폴론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의술의 신 아스클레오피스도 아폴론의 아들이다. 또 아스클레오피스는 히포크라테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어쨌든 팔방미인 아폴론에게는 아주 독특한 성적 취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과 그의 여인 튀리아 사이에는 퀴크노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퀴크노스는 요즘 아이돌만큼이나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나 보다. 아폴론은 퀴크노스가 청년으로 성장하자 그만 아들임을 망각한 채 사랑에 빠지고 말았단다. 어지간히 티를 냈는지 퀴크노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동성간의 사랑을 넘어 부자지간의 사랑이라니 퀴크노스에게는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날이면 날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퀴크노스는 카노포스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아들을 사랑한 죄로 아들을 잃어버린 아폴론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신화에서 번번이 일어나는 변신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도 변신을 가능케 하는 게 특징이다. 아폴론은 죽은 아들 퀴크노스를 백조로 환생시켜 카노포스 호수에서 노닐게 하면서 멀리서 지켜봤던 모양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로 미루어 짐작컨대 퀴크노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키지 않았을까. 퀴크노스도 아버지 아폴론을 그저 아버지로만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Cygnus(시그너스)'는 퀴노포스 호수에서 백조로 환생한 '퀴크노스(Cycnos)'에서 유래됐다. 

 

 

히아신스의 꽃말은 비애

 

아폴론의 독특한 성적취향 때문에 피해를 본 미소년은 비단 아들 퀴크노스뿐만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나르키소스에 버금갈만한 미소년이 등장한다. 바로 히아킨토스다. 신화 속에서 히아킨토스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아폴론이 사랑했던 미소년이라는 것 뿐이다.

 

아폴론은 히아킨토스를 데리고 사냥이나 운동경기를 즐기곤 했다. 아폴론은 스포츠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듯 하다. 아폴론이 왕뱀 퓌톤을 죽이고 이를 기념해서 만든 퓌티아가 오늘날의 체육대회였다고 하니 말이다. 아폴론은 어느날 히아킨토스와 함께 원반던지기를 하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폴론이 던진 원반이 그만 히아킨토스를 명중하고 말았다. 결국 히아킨토스는 과다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아폴론은 자신 때문에 히아킨토스가 죽었다며 그이 주검을 안은 채 한없이 슬퍼했단다. 

 

아폴론의 탄식이 하늘을 울려서였을까. 히아킨토스의 이마에서 흐러던 피는 흙 속으로 스며들면서 한 송이 보라색 꽃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이 꽃이 바로 붓꽃과의 히아신스(Hyacinth)다. 히아신스의 꽃말이 비애인 것은 바로 이런 신화적 배경 때문이다.

 

 

삼나무가 상록수인 이유

 

아폴론 제발. 아폴론은 두 미소년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또 한 번의 사랑행각을 벌이게 된다. 그동안은 신들의 세계였지만 이번에는 인간세상에서다. 아폴론이 인간세상으로 귀양을 온 데는 그의 아들들의 비범한 능력 때문이었다. 앞서도 언급했던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으로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했다. 제 아무리 신 중의 신 제우스라 하더라도 한 번 지옥으로 떨어지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거늘 아스클레피오스가 이런 신화 세계의 법칙을 무시했으니 제우스가 가만 둘 리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폴론에게는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천방지축 파에톤으로 그는 자신이 아폴론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 마차를 몰다 온 세상을 불로 몽땅 태워버릴 뻔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아들들 때문에 아폴론은 제우스에 의해 보이오티아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했던가. 아폴론은 인간세상에 와서도 미소년만 보면 찝적댔나 보다. 아폴론은 이 보이오티아 땅에서 미소년 퀴파리소스에게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단다. 어느날 아폴론과 함께 창던지기를 하며 여름날 오후를 즐기던 퀴파리소스는 자신이 기르던 암사슴을 산짐승으로 착각하고 창을 던져 죽게 했다. 퀴파리소스는 자신의 실수를 한탄하다 결국 숨을 거두고 한 그루 나무로 변하고 말았다. 아폴론은 죽은 퀴파리소스를 늘 곁에 두고 보고 싶었던지 나무가 된 퀴파리소스를 늘 푸른 나무, 상록수로 변하게 했다.

 

측백나무과인 삼나무의 영어 이름 '사이프리스(Cypress)'는 '퀴파리소스(Cyparissu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폴론과 같은 사랑은 그리스 신화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그렇다고 고대 그리스 시대에 동성애가 만연했을 거라고 상상하는 건 신화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신화 관련 포스팅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신화는 메타포(은유)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고도의 신화적 장치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는 말이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아폴론의 금지된 사랑은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교육제도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청소년들이 건전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도록 돌봐주는 일종의 후견인 제도가 있었다. 그리스 사회가 남성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신화에 등장하는 청소년과 후견인도 남성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향연> 마지막 대목에 당대 최고의 꽃미남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교육제도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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