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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12월, 침묵하는 다수의 저항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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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코르(1902년~1991년)의 <바다의 침묵>/1942년

 

 

권력의 언론장악 음모는 집요하다. 권력의 속성상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반복이라지만 현정부의 노골적인 언론장악 음모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방불케 했다. 그렇다면 언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완벽한 변신을 해야 하는 게 그들의 책임이자 의무란 말인가. 문제는 권력의 언론장악 음모를 일부 언론인의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언론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런 음모에 편승하고 만다는 것이다.

 

4라 일컫는 언론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 표현 자체가 무색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난 언론들도 자기검열을 통해 스스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국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고 권력의 일방적인 독주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몇달째 계속되고 있는 MBC 노동조합의 파업은 권력의 언론장악 음모에 대한 저항이자 스스로 언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총칼을 쥐고 있는 자들이 늘 간과하는 게 있다. 강요된 침묵은 긍정과 지지가 아닌 저항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점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우연한 계기에 지핀 작은 촛불이 횃불로 타올랐던 역사적 교훈을 잊고 있는 셈이다. 올해는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지난 4월의 국회의원 총선을 비롯해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지난 5년 동안 침묵했던 다수의 선택,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손쉽고 가장 합리적인 저항의 수단이 선거라는 점에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저항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베르코르(본명 장 마르셀 브륄러) <바다의 침묵>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프랑스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침묵이라는 소재를 통해 두 프랑스인이 점령자인 한 독일군 장교의 프랑스에 대한 일방적 사랑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박진감있는 필체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인 나와 질녀가 살고 있는 집을 점령한 독일군 장교 베르네르 봉 에브레나크(베르너)는 예술가다운 감성으로 독일의 프랑스 점령이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프랑스에 대한 애정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베르너는 자신을 연극 <먼 나라의 공주>에서 멜리셍드 공주를 사랑했지만 공주를 만나자마자 죽은 뤼델 왕자로, <미녀와 야수>에서 미녀에 대한 애절한 사랑으로 훗날 멋진 기사가 된 야수로 비유했다. 이런 베르너의 프랑스에 대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두 프랑스인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나와 질녀, 두 프랑스인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하에서 변절한 수많은 프랑스 지성으로 대표되는 나약한 프랑스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한편 가해자가 주장하는 우호와 협력의 허구성을 인식해가는 저항의 표현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독일군 장교 베르너의 이상주의적 꿈이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과 가해자라는 전도된 입장에서의 일방적 구애가 실현불가능한 허구임을 깨닫는 순간 두 프랑스인의 지루했던 침묵도 끝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이다. 최전선으로 자원하게 된 베르너를 향해 주인공은 처음이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

 

사실 독일군 장교 베르너의 프랑스에 대한 애정은 두 프랑스인의 마음을 조금씩 열리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가해자의 일방적 사랑은 점령을 위한 또 하나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원래 화가였던 베르코르는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의 군복이 보기 싫어 파리를 떠나 시골에서 은둔생활을 했으나 수많은 작가들이 독일의 점령하에서 변절하는 모습을 보며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베르코르도 <바다의 침묵>을 내놓으면서 사용한 필명이다.

 

바다는 말이 없다. 두려울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수면 아래서는 수많은 바다 동물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바다의 침묵>은 '암살당한 시인 생 폴 루의 추억을 위하여'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생 폴 루. 독특한 이름만큼이나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어디에서도 시인 생 폴 루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가지지 못한 것,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일까. 이 소설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 글머리에 이렇게 짧은 추모 문구를 넣었을까. 그나마 다음백과사전에 생 폴 루에 관한 짧은 설명이 있어 소개한다.

 

'말라르메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초기에 상징주의에 매료되었다. 점차 이미지의 자유로운 분출과 표현의 풍부함을 즐겨, 이성의 테두리를 벗어나면서 동시에 예지를 얻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自動記述) 기법을 수용했다. 뒤늦게(1920년대)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이 운동의 선구자로서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점령기 초기에 나치 병사에 의해 가족이 학살되는 불운을 겪었으며 그 역시 얼마후에 브레스트의 한 병원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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