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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의좋은 형제는 왜 도둑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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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권(1928년~1999년)의 <가난한 형제>/1963년

 

가난하지만 의좋은 형제가 있었다. 봄에는 같이 모내기를 하고 여름에는 함께 풀도 뽑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프다는 속담도 있건만 이 형제에게는 예외였나 보다. 형제는 가을이 되자 넉넉하지는 않지만 무사히 추수를 끝냈다. 추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형과 아우는 서로의 비루한 처지를 생각하며 몰래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모두가 잠든 밤, 형은 자신의 볏단을 아우의 논에 옮겨놓고 아우는 아우대로 자신의 볏단을 형의 논에 옮겨놓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도 아니고 밤마다 볏단을 날랐음에도 불구하고 볏단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형제는 어느날 밤 논 한가운데서 마주치고 그동안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알게 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의좋은 형제'라는 제목의 민담이다. 이 민담은 최근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내려오는 조선시대 이순, 이성만 형제의 실제 이야기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많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63년 『사상계』에 발표된 오유권의 소설 <가난한 형제>는 어린 시절 읽었던 '의좋은 형제'를 연상시킨다. 비빌 언덕이라곤 가족밖에 없어서였을까 주인공 인수와 평수 형제를 비롯한 가족들은 극심하게 궁핍한 처지에서도 따뜻한 가족애를 잃지않고 살아간다. 워낙 가난한 마을인데다 연 이태를 큰물과 가뭄으로 곡식 한 톨 입에 댈 수 없는 생활이지만 이 가족을 지탱해 온 것은 다름아닌 가족간의 끈끈한 정이었다. 그래서 이 가족의 비극은 읽는 이로 하여금 더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한다.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전라도 지역 어느 가난한 농촌마을로 하천부지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인수와 평수 형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형제는 늙은 어머니와 임신중인 인수의 아내와 백일 된 아이가 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서른 살인 인수와 열아홉 살인 평수는 형제라기보다 오히려 아저씨와 조카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제의 우애와 형제의 가족에 대한 헌신은 이들 가족이 힘겨운 삶을 버티어내는 힘이다. 형제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묘사는 이들이 얼마나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삭은 지붕은 군데군데 도랑이 져 처마 끝이 우글거리고 바깥벽도 부엌 한쪽이 내려앉았다. 그 부엌에 흙투성이 갈나무 한 줌과 부지깽이가 나가 뒹굴고 살강의 그릇도 차갑게 보였다. <중략> 때전 대자리가 다 몽그라지고 바람벽에는 습기 찬 곰팡이내가 매캐하였다. 빈 횃대엔 무색옷 한 벌이 안 걸려 있고 신문지로 다닥다닥 붙인 대상자만 윗목에 휑뎅그렁하였다. 그 아랫목에서 아내가 허리를 내놓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 옆에는 백일이 간 애가 응애응애 보채고 있고. -<가난한 형제> 중에서-

 

게다가 하천부지 공사도 자금조달이 끊겼다는 이유로 중단되고 임금까지 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 가족의 운명은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소설은 1960년대 피폐한 농촌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임금체불은 물론 정부에서 나오는 극빈자 구호미라는 것도 농사를 짓고 있는 세대에게만 한정적으로 지원된다. 마을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굶어죽고 자살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어쩔 수 없이 나선 지게꾼이라는 것도 뒷돈이 있어야 한다. 동생 평수가 이런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문전걸식 즉 밥동냥을 하는 것이다. 상갓집에서 전과 떡부스러기를 몰래 주머니에 넣는 인수의 모습에서는 당시 농촌사회의 참혹상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한국전쟁 이후라고는 하지만 해방이 된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이들은 왜 자기 논 한 평 없이 막일과 밥동냥을 전전해야만 했을까. 

 

전근대적인 지주제의 몰락과 농업근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1950년 농지개혁을 찬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농민들 입장에서 농지개혁이 전적으로 성공한 개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해방 후 바로 실시되지 못하고 지연됨으로써 실제 분배과정에서 누락된 농지가 생겼고 전근대적인 지주소작관계마저 청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실제 농지개혁 이후에도 농촌인구의 상당수가 소작농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자작농 또한 소작농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농지개혁이 훗날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일제강점기 어느 계급보다 급진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미국은 농지개혁을 미루고 있는 이승만 정권에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농지개혁을 재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승만 정권 하에서 농지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죽산 조봉암은 훗날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하게 된다. 

 

 

한편 파행적으로 실시된 결과 전근대적인 지주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상황에서 1954년부터 미국의 농업공황 해소책으로의 일환으로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경제원조라는 명목으로 유입됨으로써 당시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촌사회는 원조경제시스템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농지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촌사회가 피폐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소설은 당시 농촌사회의 참혹성을 묘사하는 데만 그치지는 않는다. 하천부지 공사 중단으로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집단적으로 항의하기도 하고 영농자금과 절량농가대여곡 분배과정에서 무토지 농민들을 제외하는 등 농촌현실을 무시한 정부정책에 적극적으로 항의하기도 한다.

 

"누가 지금 그런 설굘 들으러 온 줄 아오? 농촌 형편이 어떻게 돼있는 줄 알고나 말하요. 우선 참고 협력하라고?……죽 떠서 식힐 동안이 어려운 건데 굶어 죽는 사람은 놔두고 장차를 위하자는 거야? 그게 도대체 될 말이야? 당신도 공무원이면 이런 민정을 정부에 건의하시요. 객쩍은 소릴 지껄이지 말고." -<가난한 형제> 중에서-

 

지게꾼 일거리를 찾아가 하루 품이라도 부탁한 인수에게 "우리 손주놈 세발자전거 하나를 못 사주고 있네."라는 고수영감의 거절은 농지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토지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 당시 농촌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동냥밥 한 주먹에도 애틋하게 서로에게 양보하는 이 가족의 미래는 하루가 멀다하고 굶어죽고 굶주림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 동네 사람들의 모습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을 요즘말로 옮기면 '밥이 인권이다' 정도가 아닐까.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건지 분간할 수도 없는 어머니와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인수와 평수 형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수머리 영감네 곡식창고에서 곡식 가마니를 훔치는 것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생계형 범죄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인수는 발을 헛디뎌 생사를 오가는 처지에 이르고 만다.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시 농촌사회의 참혹성을 고발함과 동시에 당시 농민들이 비참한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저자의 주제의식은 소설 마지막에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자살한 살구나무집 가족의 장례식이 있던 날 상여꾼들이 시위대가 되어 상엿소리 대신 절규하듯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극빈자에게 구호미를 달라."

"노동자에게 일을 달라."

 

농지개혁이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사회는 토지불균형과 토지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고 개방의 물결 속에서 그 피해가 농민과 도시서민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 <가난한 형제>는 결코 1960년대 농촌현실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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