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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녀는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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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경희>/1918년

경기도 수원시에서는 2000년부터 해마다 ‘나혜석 거리 예술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행사기간 동안에는 나혜석 미술대전 수상자들의 작품 전시회, 음악 콘서트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린다.


나혜석, 생소한 이름이다. 대중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름 석자에 불과하지만 그녀에게는 ‘조선 최초 여류 서양화가’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있다. 그러나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조선 최초 여류 서양화가’라는 틀 속에만 가둬두기에는 부족하리만큼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1910년대 여성에게 교육은 달나라 얘기만큼이나 허무맹랑했던 시기였지만 나혜석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그것도 서양미술을 전공했던 신여성이었다. 또 국내에 돌아와서는 당시 여성들에게 목숨처럼 지켜야만 했던 아니 여성들에게만 강요되었던 정조와 순결의 부당성을 거침없이 폭로한 여성해방론자였다.

그녀는 남편과의 이혼 후에 사회로부터 쏟아지는 냉대와 비난 속에 ‘이혼고백서’라는 제목의 글을 대중잡지에 싣기도 했고 여성들이 강요당했던 정조에 대해서도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대를 뛰어넘은 진보적 여성관은 같은 여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에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수천 년 동안 뼛 속까지 파고든 인습이 하루 아침에 녹아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그녀는 예산 수덕사에서 출가를 하고자 했지만 이도 이루지 못하고 사회의 손가락질 속에 행려병자로 발견돼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혜석, 그녀는 신여성이요, 서양화가이기도 했지만 소설가이기도 했다.
나혜석이 1918년 쓴 첫 소설인 『경희』에는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그녀의 고뇌가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 속 주인공인 경희는 나혜석과 마찬가지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썩 달갑지 많은 않다. 사돈마님의 말처럼 당시 여성에게 교육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저 시집만 잘 가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그리 많이 해 무엇하니. 사내니 골을 간단 말이냐? 군 주사(郡主事)라도 한단 말이냐? 지금 세상에 사내도 배와가지고 쓸데가 없어서 쩔쩔매는데…”

경희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나혜석은 여성들이 인간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를 교육의 부재로 생각했다. 현실에서도 나혜석은 자신보다 1살 많은 아버지의 첩을 보면서 군소리 없이 살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가슴아픈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 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경희도 조선 사회를 살고 있는 여자였다. 조선 가정의 인습에 파묻힌 여자였던 경희는 현실적인 고뇌에 빠지게 된다. 바로 결혼이었다. 아버지는 김판사집에 경희를 시집보낼 생각이었다. 경희는 쌀이 곡간에 쌓이고 돈이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밟기도 쉬울 황토길을 걸을 것인 것, 제 팔이 아프도록 보리방아를 찧어야 겨우 얻어먹게 되고 종일 땀을 흘리고 남의 일을 해주어야 겨우 몇 푼 돈이라도 얻어보게 되는 길을 갈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경희의 고민은 급기야 그 동안 조선의 여성들이 기계와 같이 본능적으로 금수와 같이 살아왔다는 자신의 신념을 교만한 눈으로까지 치부하게 된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주위의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그 명칭들을 불러본다. 그 와중에 경희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명칭은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사람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명칭은 다름아닌 사람이었다. 드디어 벌벌 떨었지만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말했다.

“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지요.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을 제가 먹는 것이 사람인줄 압니다. 조상이 벌어논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또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 개나 일반이지요.”

나혜석은 소설 『경희』를 통해 그녀가 조선 사회에 던지고자 했던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인류의 여성이다.”

나혜석은 3.1만세운동에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을 향해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독설(?)을 퍼부었고 행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나혜석이 죽은 지 60년이나 지났지만 그녀가 걸었던 길은 아직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여성으로 대표되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어 우리 사회 곳곳을 검은 그림자로 짙게 드리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통죄의 위헌 여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문제는 여성 관련 단체들을 포비아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남성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간통죄의 최대 피해자인 여성을 단순한 여성이 아닌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전제 위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나혜석이 바라는 세상은 그녀의 바램과 달리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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