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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洗冊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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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병원을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건강이나 체력만은 늘 자신만만했기에 영 어색한 일상이 아닐 수 없다. 가벼운 질병은 체력으로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기에 몸이 알리는 적신호에 무신경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병원이 낯선 공간이었기 때문일까 여전히 병원에 간다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 예방주사 맞기 전에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을 이 나이에 느끼기에는 부끄러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갓 중년에 접어든 나이지만 세월의 무게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어느 시인의 노래가 가슴 절절히 다가오는 요즘이다. 게다가 한 번 병원에 가면 2~3개 진료과목을 동시에 접수해야 하니 이 또한 스트레스다.

 

건강한 체력에 건강한 정신이라고 했던가! 요즘은 만사가 귀찮다. 이번 기회에 읽고 싶었던 책들이나 좀 읽어야겠다 싶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느끼고 있다. 몸뚱아리 여기저기를 쑤셔대는 가벼운 통증들로 집중은 커녕 짜증만 늘어간다. 그렇다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니 온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다. 뭔가 변화를 줘야겠다 싶어서 지난 금요일에는 병원에 들러 다음 주에 있을 MRI 촬영을 예약하고 그동안 방 안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던 책들을 정리했다. 몇 권 되지 않은 책이지만 변변한 책장도 없이 집 안 구석구석에 나뒹굴다보니 먼지가 쌓여 오래묵은 때로 뒤덮인 책이 한 두 권이 아니고 누렇게 변색된 책들이 볼 때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작심하고 정리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책들이다. 한편 어딘지 생소하게 느껴지는 책들도 많다. 목포에서 서울로, 다시 서울에서 대전으로 또 대전에서 여기저기 이사다니면서 없어진 책들도 많지만 어릴 적 책은 버려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책을 대했던 터라 20년이 훌쩍 넘은 책들도 꽤 있다. 세책단상(洗冊斷想). 책을 덮고 있는 묵은 때를 씻어내면서 잠시 생각나는대로 끄적여본다.

 

 

책장을 새로 구입해서 양쪽 벽면에 배치하고 주제별로 정리해보자 싶었는데 묵은 때를 닦아내느라 힘이 쪽 빠져 나중에는 별 생각없이 잡히는대로 보이는대로 정리하고 말았다. 책장에 깔끔하게 정리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지라 구입한 책장으로는 감당이 안된 책들은 공간이 생기는대로 집어넣었더니 다시 산만해 지고 말았다.

 

 

대학 시절 즐겨읽었던 전집 소설들, <태백산맥>, <해적>, <아리랑>, <동의보감> 등도 따로 정리해 두고..참 그러고 보니 <녹슬은 해방구>, <장길산> 같은 전집들은 정리하다보니 보이지 않았다. 다 어디로 갔을까?

 

 

최근에 구입한 전집들, <김대중 자서전>, <한국문학선집>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책들이다. 황석영의 <삼국지>는 범우사에서 발행하는 <책과 인생>이라는 월간지를 정기구독하면서 얻은 보너스(?)다. 그동안 이 빠진 모양으로 사서 읽었던 <삼국지>는 이번 기회에 버리기로 했다. 버리고 보니 번역에 따라 같은 <삼국지>라도 그 해석이 조금씩 다를텐데 괜히 버렸나 싶기도 하다.

 

 

그리 많지도 않은 책인데 구입한 책장이 부족해서 책장 머리와 천장 사이에 쌓고보니 좀 있어(?) 보인다. <묵자>, <장자>, <시경>을 보니 중국 고전들을 원문으로 읽고 이해해 보기 위해서 한자 공부에 열중했던 때가 생각난다. 요즘 다시 시작해볼까 하는데 하고 싶은 게 한 둘이 아니라 자투리 시간을 만드는 것이 여간 여의치 않다. 인간이란 참 묘한 존재다. 여유가 있을 때는 술로 지새운 날이 많았는데 정작 여유가 없어지니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열정이 새록새록 피어나니 말이다.

 

 

대학 졸업한 지 15년, 아직까지 전공서적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렇다고 전공에 그렇게 충실했던 것도 아닌데. 대학시절 전공은 졸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커리큘럼만 이수하고 그 외 시간은 인문대학이니 사범대학이니 예술대학 수업만 전전했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꺼내볼 때가 있어 여지껏 가지고 있는 것인지, 책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ㅎㅎ..

 

 

도대체 <카리마조프의 형제들> 2권은 어디로 간거야?...방 어딘가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걸 봤는데....<법의 정신>, <무의식의 분석>, <역옹패설>....도대체 저자도 내용도 가물가물한 고전들, 최근 다시 고전읽기를 시작했으니 언젠가 다시 내 손때가 묻을 책들이다.

 

 

우리 체 선생은 어디에 놓아두어도 눈에 띈다. 대학 시절 학교를 오가는 전철 안에서 읽었던 체 게바라의 일대기에 반해서 그의 얼굴이 박힌 티셔츠도 즐겨입고,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는 대표 이미지로 체를 표절(?)를 하고 수경스님의 여강선원을 또 한 번 표절해 '여강여호'라는 나름 멋진 닉네임까지 붙였으니 표절논란이 이슈인 요즘 몸조심(?)이라도 해야할까?...ㅎㅎ..대학 시절 흔치 않았던 북한소설 백남룡의 <60년 후>가 기억의 저 편에서 되살아난다.

 

 

어울리지 않게 시집도 꽤 있다. 보고 있으니 손발이 오물거린다. 나는 그래도 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친구들은 남자답다 못해 우락부락한 내 외모를 보고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나에게로 전이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편견이라 치부하면서도 쑥스러운 건 또 왜야?....ㅎㅎ...나 살아있는 동안, 아니 조만간에 고은 선생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환희를 만끽해 보길 기원해 본다.

 

맞은 편 벽면에는 신화 관련 책들, 단편소설들, 정기구독하고 있는 책관련 월간지, 계간지를 배치했는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컴퓨터에 옮기는 과정이 익숙치 않아 부득이 생략.....ㅎㅎ...

 

중학교때부터인지 아니면 대학 시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마지막이자 시작은 불혹, 40이라고 생각했다. 40이 되면 그리 깊지 않은 산 속에 들어가 작은 집 하나 짓고 텃밭을 일구며 책과 소일하는 황당한 꿈을 꾸어왔다. 하루 하루 먹고사는데 급급해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고 있다 찰나의 여유로 하늘을 보며 내 나이가 벌써 40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허망함과 허탈감이란.......나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망상주의자인가 아니면 현실을 애써 극복하려는 이상주의자인가 헛갈릴 때가 많다. 그래도 조금 늦춰졌을 뿐 그 황당한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하나의 꿈이 더 있다면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딱 하나 남기고 싶은 것, 책이다. 내 손 때 묻은 책들에 누군가가 빠져있다는 상상, 이보다 즐거운 유산이 있을까 내 멋대로 안위해 본다. 아쉬움이 있다면 몇 십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도 활자책이 남아있을까? 전자책에 밀려 지금의 이 책들은 박물관 박제마냥 조금 떨어져 볼 수밖에 없는 유물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때는 그렇게 될지언정 소박한 내 꿈만은 간직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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