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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현대를 사는 고독한 군상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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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석의 <인형 만들기>/1990

한때 우리나라는 가족계획의 성공 국가로 꼽혀왔다. 좁은 국토와 제한된 부족한 지하자원으로 인해 가족계획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대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 가족계획 정책은 현재 국가 경쟁력 약화라는 아이러니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게다가 출산율 저하의 원인이 되는 싱글족의 유형도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고 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를 의미하는 DINK(Double Income No Kids)에서 '누에고치'라는 말에서 유래한 코쿤족(Cocoon, 외부로 나가는 대신 가상현실에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싱글족)까지 생겨났다. 최근에는 '프리 아르바이터(Free Arbeiter)'의 줄임말로 일정한 직업 없이 필요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종의 생계형 아르바이트족인 프리터족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한편 요즘 화이트 칼라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혼자 살면서 인생을 즐기자는 바이링(白領)족까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싱글맘, 싱글 대디까지.

싱글족을 의미하는 이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개인주의의 발달이 가져온 결과라고 하기에는 그 유형들이 사회 시스템의 운용과 너무도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왜 현대인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고독을 즐기는 것일까. 소통할 수 있는 도구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소통을 위장한 기계와 사람, 여기에 소통을 가로막는 사회와 국가의 정책은 결코 즐거울 수 없는 고독을 마치 현대인의 전유물처럼 만들고 있다.

최인석의 소설 <인형 만들기>는 이런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기본 구도는 노동과 자본의 대결이다. 저자는 노사의 대결구도에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내고 있다. 그야말로 이분법적 세계가 아닌 다양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야기다. 노동조합 파업이 있던 날 엘리베이터에 갇힌 경현과 영주는 물론 노동조합 조합원들과 한주 그룹의 임원진들 또한 고독한 현대인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경현이 노조를 바라보는 시선은 소시민들의 가장 솔직한 심정이다.

경현은 용원들이 자신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하여 노조를 결성한다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고 믿는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파업을 벌이는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현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조에서 구사하는 전투적인 어휘들이다. 투쟁이라니? 누가 누구와 투쟁을 한단 말인가? 사수라는 건 또 뭔가? 죽음으로써 지킨다는 것은 벌써 협상을 배제하는 언사가 아닌가? -<인형 만들기> 중에서-

소설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재벌의 문제를 1980년대 시선을 통해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권력과 결탁해 성장을 거듭하면서 소상공인들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는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이 바로 그것이다.

여의도에서 마포대교를 건너다 보면 거대한 황금색의 건물이 마치 하늘을 향하여 곤두선 화살표처럼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조립 생산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전투기를 제작하는 방위산업체로부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낵 과자인 '초콜릿 팝스'를 만들어내는 제과업체에 이르기까지, 58개의 크고 작은 계열회사를 거느린 한주그룹의 본부 건물이다. -<인형 만들기> 중에서- 

저자의 재벌과 노사문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의 한계는 보다 본질적인 현대인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또 다른 의도로 보인다. 소통 부재의 결과인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은 영태를 둘러싼 노동조합 내부의 갈등이나 각 부서의 무사안일로 인해 조작된 보고서를 받게 된 강사장을 통해 소설이 단순히 노사 갈등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엘리베이터에 갇힌 경현과 영주의 대화와 대화 끝에 보여준 격렬한 키스 장면은 현대인의 고독과 그 고독을 벗어나려는 욕망의 실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주의 대사를 통해 실체를 드러낸 '인형 만들기'는 이런 현대인의 고독과 욕망의 상징이다.

"전 갇혀서 사는 데 익숙해요. 감옥 같은 데에 갇힌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소일거리를 만든대요. 머리카락으로 인형 같은 걸 만든다거나, 잇솔 토막으로 아주 정교하게 여자의 몸을 조각한다거나,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죠? 하지만 갇힌 사람들에게는 그건 아주 당연한 생활 방법이에요. 어쩌면 유일한 생활 방법인지도 모르구요. 제가 카페에 나가 컴퓨터 가게를 마련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전 머리카락으로 인형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게 완성이 될지 안 될지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다른 할 일이 없는 걸 어쩌겠어요?" -<인형 만들기> 중에서-

엘리베이터는 현대 소시민들에게 강요된 폐쇄된 공간, 고독을 강요당하는 상징으로서의 실체다. 인형을 만드는 행위는 고독을 벗어나려는 현대인의 욕망과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 욕망이 결코 긍정적인 방향으로 표출될 수만은 없는 것이 현대인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비록 같은 회사에 근무하지만 낯설 수밖에 없는 경현과 영주가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이 주는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형 만들기'는 고독을 탈출하려는 현대인의 욕망과 동시에 좌절한 현대인이 찾아가는 고독의 현장인지도 모른다.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영태도, 아내의 도움으로 그룹의 임원이 된 강사장도, 대기업의 중견간부가 된 경현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 일이 끝나면 카페에서 일하는 영주도 자기를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상징적 존재들인 것이다. 영주가 일하는 카페 이름이 '인형'이라는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이들이 인형을 만들지 않고도 현대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사회와 국가의 책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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