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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자살을 보는 삐딱한 시선, 과연 바람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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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의 <달콤한 게 좋아>/2012

작년은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작년 이맘때 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물류센타에서 배송기사 한 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입기사로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을 때였다.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을 느끼게 했고 눈에는 늘 고단한 삶의 흔적들이 맺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랬을까? 삶의 끈을 잡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을까? 이래저래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또 한 번 자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늘 나와 출퇴근을 같이 하던 동료였다. 가끔씩 자신을 둘러싼 힘겨운 삶의 얘기들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럴수록 더 웃고 누군가에게 더 살갑게 다가서려고 노력하던 친구였는데….

한동안 직장 내에서는 두 건의 자살 사건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삼삼오오 모이면 생을 달리한 그들의 얘기였지만 따지고 보면 비난 일색이었다. '자식이 둘이나 있다는데 가장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선택'이었다느니,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어떡하라고'라느니,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살면 된다'느니 어디에도 그들이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던 고민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이런 표현들 속에는 망자에 대한 연민과 슬픔과 안타까움이 전제되긴 했지만 그들이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섭섭하고 서운해 할 말들뿐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더 강했을텐데 말이다.

정미경의 소설 <달콤한 게 좋아>의 주인공 추는 지금 생을 정리하기 위해 어머니집 3층 옥상 난간에 서 있다. 추의 선택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되면 세사람은 일생 동안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할거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반응은 싸늘하다. 어머니는 그래 한 번 뛰어내려보라고 한다. 고작 한다는 말이 '카스테라 하나 사오라는 게 그렇게 고깝드냐.'는 것이다. 여자친구 민혜는 '너, 그 잘난 구두 때문에 여태 이러는 거야?'라며 쏘아붙인다. 추가 자살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던 친구 강은 통화를 하는지 오른손을 귀에 댄 채로 빵집 모퉁이를 막 돌아서며 느릿느릿 참 여유있는 모습이다. 추의 머릿속에는 '어이 힘을 내. 순간이야. 어서 뛰어내려'하는 소리들이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들린다. 어느 누구도 추의 자살에 관심이 없다. 추가 뛰어내려도 사람들은 그 장면을 얘기하며 일상을 살아갈 것처럼 보인다.

언제부턴가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뉴스 꼭지마다 자살 소식이 끊기는 법이 없다. 이제 자살은 너무도 흔한 일상 중의 하나처럼 느껴질 정도다. 자살 관련 인터넷 댓글에는 '그 용기로 살아보지'라는 냉소로 넘쳐난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자살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안겨주는 죄 아닌 죄다. 그러나 최소한 미디어만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는 자살에 대한 고민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 팩트가 아닌, 기계적 중립이 아닌 자살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저 가십으로 처리하기에는 자살을 부추기는 사회적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자살을 여지없이 희화화시키고 만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메세지일 것이다. 옥상 난간 위에 선 추를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너무도 일상적인 태도는 자살을 바라보는 사회의 무관심의 단면이다. 추가 친구 강의 제안으로 커피 전문점에 투자했으나 강의 파산으로 자신이 채권자가 아닌 투자자였다는 사실, 즉 대출까지 받아가며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어머니와 민혜와의 갈등을 고민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었어도 추가 옥상 난간에 서야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자살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의식은 추의 발이 콘크리트 회반죽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 상황에서 경찰에게 잡히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한편 어머니의 엽기적인 행각은 추의 선택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삶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추가 사온 카스테라는 바퀴로 보이는 벌레를 키우기 위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 벌레들이 늑막염에 좋다는 믿음으로 물에 타 마시고 있다.

달콤한 게 좋아. 힘겹지만 죽음보다는 삶이 그렇다는 것일까. 아니면 비교 대상이 아닌 산다는 것 그 자체로서 그렇다는 것일까. 어쩌면 달콤함에 취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현대인에 대한 역설인지도 모르겠다. 자살 해프닝이 실패로 돌아간 후 추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처럼 달콤하지만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해야 하는 게 현대인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연대의식은 그런 공포에 대한 불안의 산물인 것이다.

"엄마, 벌레들이 떼지어 밥을 먹는 건, 공포 때문이래. 사랑이나 연대감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세계와 다가오는 시간이 불안해서."

자살을 부추기는 사회, 교과서 속 삶들이 결코 교과서 속 장미빛 미래와 일치하지 않는 사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대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고민을 공유해야 하는 것은 이런 사회를 동시대에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선택만 다를 뿐. 나도 언젠가는 추의 입장에 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은 결코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부조리와 모순으로 점철된 사회가 주는 공포와 불안은 연대와 소통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극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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