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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아버지의 흔적에 하염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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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철의 <강 건너 저쪽에서>/1991년

유방암 수술, 당뇨, 골다골증, 고혈압…. 아버지가 떠난 후 종합병동인양 갖가지 질병을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달고 사는 어머니가 가장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미운 정도 정이라고 평생 무능력한 알콜 중독 남편을 떠나보내고 그 외로움은 어떻게 견디며 살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행히 고단한 세월의 무게로 단련되었던지 그래도 몇 달 동안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도 그동안의 불효의 시간들을 만회라도 할까싶어 그 싫어하던 전화도 자주 하고 틈나는대로 집에 내려가는 걸 보면 아버지가 나에게 훈계라도 하려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나 싶기도 하다.

얼마 전 집에 내려가서 우연찮게 아버지의 흔적들을 발견하고는 울컥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부자지간에 그리 살갑게 살아오지 못한 탓에 장례식장에서조차 인색했던 눈물을 어머니 몰래 흘리고 말았다. 안방 서랍장을 가득 채운 노트들. 그 노트들을 들춰보니 아버지의 글씨체로 보이는 메모들이 깨알처럼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어머니의 서툰 글씨체로 수정된 메모들이 보였다. 아버지는 평소 메모하는 걸 좋아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생각으로 넘기는 법이 없었다. 친척들 전화번호, ○○○○년 ○○월 ○○일에 세내줌, ○○월 ○○일에 큰아들 부부가 오기로 함. ○○월 ○○일에 집사람이 ○○병원에서 수술 예정…. 이렇게 꼼꼼하던 양반이 어찌 그리 당신 건강은 챙기지 못했는지.

한남철의 소설 <강 건너 저쪽에서>를 읽으며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한 그날의 회한 때문이었다. <강 건너 저쪽에서>는 주인공 '나'가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할머니의 살아생전 흔적들을 더듬어보는 소설이다. '나'의 기억 밖에 존재했던 흔적들은 어머니를 통해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인천에서 강화로, 다시 강화에서 서울로 이사하며 살았다. 가난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즈음 할머니는 똥오줌도 못가리는 치매 노인이 되어 있었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할머니는 후딱하면 며느리와 손녀들에게 '이년, 저년' 욕설을 내뱉기 일쑤였지만 챙겨 먹는 정신만은 똑똑했다. 가난의 기억 때문이었지 싶다. 

아버지도 그랬다. 육지와 한참 떨어진 낙도에서의 지긋지긋한 가난. 그러나 자식들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얼마되지 않은 전답을 팔아 육지로 나와 전세를 전전했다. 기술이라곤 갯벌에서 낙지 잡고 염전에서 소금만드는 것이 전부였던 아버지가 육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막일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람 좋은 탓에 실속 챙기는 오지랖 대신 늘 피해자로 살아야만 했다. 술은 이런 아버지를 버티게 한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들 딸 남부럽지 않게 잘 키워놓았으니 이제 좀 인생을 즐길 때도 되었건만 젊은 날 술과 담배는 아버지의 생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어머니에게 들은 아버지의 유언 아닌 유언은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당신 병은 당신이 잘 안다며 집에서 죽게 해 달라고, 병원 신세 졌다가는 자식들 재산마저 다 탕진한다며.

할머니는 젊은 시절 전쟁통에 큰어머니와 작은 삼촌을 잃었고 할아버지는 집을 담보로 빚을 내어 연평도에 배를 띄웠으나 배와 함께 바다에 사라지고 말았다. 서둘러 서울로 옮긴 이유도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빚 때문이었다. 가난은 대물림됐고 서울 어느 달동네에 정착했다.

그 당시에 가난은 너무도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게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다만 궁금했던 건 어릴 적 설이나 추석 때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면 나란히 누워있는 무덤에 절을 한 번 더 하곤 했던 것이다. 할머니 무덤이라는데 같이 살진 않았지만 할머니가 살아계시지 않았던가. 살아계신 할머니는 아버지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작은 아버지, 고모들과 아버지는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또 내 위로는 네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내가 두 살 때 물에 빠져 죽었으니 기억이 날리 만무하지만 어머니는 가끔 '너네 아버지를 닮아 동네에서는 신동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 옛날엔 왜 하나같이 구구절절한 가족사가 있었는지.

저자는 왜 특별할 것도 없는 할머니의 일생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걸까. 나는 또 왜 소설을 읽는 내내 몇 달 전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는걸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할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기필코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죽음은 무(無)의 상태다. 이승과의 단절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고나면 남아있는 자들과는 모든 연이 끊어진 이 세상에 살았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는 그런 형체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일까.

이걸 보면 시간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흔적을 반드시 남겨놓고 흐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보낸 세월의 시간은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의 뼈를 이 땅에 묻어버린 것 이외에 또 다른 흔적으로 무엇을 남겨놓은 것일까? -<강 건너 저쪽에서>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이 너무 일상적이어서 남은 자들의 기억에 저장되지 못할지언정. 의식하지 못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런 망자의 흔적들 위를 걸으며 살아간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넌다고 한다. 이승과의 마지막 이별은 이승에서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망자가 남겨놓은 흔적들은 다시 장차 망자가 될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희망과 절망이 무엇인지 또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남에게 해 끼친 일도 없이 그저 열심히 살다간 우리네 이웃들은 이름 석자 제대로 남겨놓지 못하고 떠나지만 그 흔적만은 오롯이 남겨놓는다.

세상에 의미없는 죽음이란 없다.

그날 아버지의 흔적에 하염없는 눈물만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올 여름엔 아버지의 또 다른 흔적을 찾아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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