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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첫사랑의 설레임과 통과의례로서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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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그 사람의 첫사랑>/1999년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감정의 해방이나 개성의 존중을 주장한 문학운동을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이라고 한다. 이 말이 조금 어렵다면 '질풍노도(疾風怒濤)'라는 우리말 번역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질풍노도(疾風怒濤)'는 당시 독일사회의 맹목적인 출세의식과 소위 사회지도층의 경직된 사고, 구시대의 신분제도로 인한 자유와 독립 의지의 부재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문학운동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괴테(Johann Wolfgang Goethe, 1749~1832, 독일)를 꼽는다. 

괴테는 그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질풍노도'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 선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청소년기를 이르는 '질풍노도의 시기'도 괴테에서 비롯되었다. '질풍노도'란 말 그대로 '매서운 바람과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왜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로 표현할까. 질풍노도처럼 격한 감정변화를 겪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이기 때문이다. 자아형성의 과도기인 청소년기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순종보다는 반항이 그들의 아이콘이다. 성적 호기심이나 집단 폭력 등도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변화에서 기인한다. 결코 어른들의 사회규범과 법률적 잣대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학교폭력을 대하는 교육당국이 내놓은 해법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과연 이런 청소년기의 특징을 이해는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들 스스로도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면서 내놓은 해법이라곤 처벌과 격리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질풍노도는 방황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 어느 시기보다 활력이 넘치는 시기이기도 하다. 교육의 본질은 청소년기의 방황을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의 성장을 위한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것이 아닐까.

배수아의 소설 <그 사람의 첫사랑>은 누구나 사춘기 시절 경험해 봤음직한 첫사랑의 감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첫사랑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겪었을 성적 호기심의 발로이자 억압된 감정의 폭발이기도 하다. 또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이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그러기에 환상을 꿈꾸지만 그 환상은 여지없이 깨어지기 마련이다.

주인공 소년은 1899년 태어난 어느 사람의 장례식에서 '검은 치마에 자줏빛 스웨티에 운동화, 시린 듯 빨갛게 튼 손'을 하고 있는 연이를 처음 보고는 스스로 놀라고 부끄러워 할 정도로 끌리고 만다. 당연한 감정이지만 소년이 연이에게 집착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런 감정을 억눌러야만 하는 주변 환경이 바로 그것이다. 가부장적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소년의 집안과 작은 시골에서 왕자처럼 지냈던 그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신도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면서 느끼는 좌절감은 연이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질풍노도는 억압의 강도가 거세질수록 해방구를 찾는 몸부림도 더욱 격렬해지는 법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낮과 밤처럼 다른 두 개였다. 순응하는 가난과 반복되는 노동과 놀이와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관습과 해야 하는 착한 일. 그러나 동시에 읍내의 만화방이나 금지된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상상 이상의 외설적인 장면들. 다방이나 여인숙의 비닐 장판 위에서 그들 이외의 누군가가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보통 때는 태연한 표정으로 읍내의 거리와 버스 정류장과 학교와 우체국을 걸어 다닌다. 소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사람이 첫사랑> 중에서-

소년의 첫사랑에 대한 설레임은 연이, '천연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처럼 그야말로 환상이었지만 연이와의 하룻밤은 그동안 연이를 둘러싼 온갖 소문들이 사실로 증명되면서 그 환상은 깨지고 만다. 소년의 성장통이 여기까지 와서 끝나는 데는 질풍노도를 이해하지 못한 주변환경과 그에 따른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환상이 깨지고서야 소년은 비로소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자랑스런 아들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여전히 아버지가 소년의 질풍노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왜곡된 길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사랑은 버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식어갔지만 그는 결정적인 것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불행했으나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그 사람의 첫사랑> 중에서-

'결정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소년은 통과의례로서의 성장통을 이겨낸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신이 결코 '왕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듯이 냉혹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몰라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지만 한편 소년의 감정을 이해해주지 못한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진다.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변화와 그에 따른 갖가지 문제들을 어른들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게 이 시기가 갖는 특징이다. 분출하는 호기심을 이해해주고 같이 얘기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자꾸 음지로 숨어들어가 그들만의 비밀의 방을 꾸미게 될 것이다. 요즘 심각해지고 있는 학교폭력을 처벌만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청소년기 성장통을 이해하지 못한 어른들의 무지의 소치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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