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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착각이 주는 그 달콤하고 씁쓸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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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의 <폴링 인 폴>/2011

                                                    

맨 정신으로는 참 살기 힘든 세상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 연일 쏟아지는 어른들의 그것을 빼다 닮은 아이들의 폭력 뉴스, 아이 분유값 때문에 범죄자가 된 어느 아빠의 기막힌 사연, 세계화란 미명 하에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 강의실과 직장 대신 비틀거리는 네온싸인 아래를 방황하는 청춘들. 맑은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이 되어 일상을 짓누른다. 두 어깨에 지구를 받치고 신음하는 아틀라스처럼.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이 단어가 낭만처럼 느껴지는 것은 정신없이 변해가는 현대사회의 속성에 누군가에 의해 내팽개쳐진 내 삶의 무게가 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속 비현실의 허상 속에서 낭만을 찾아야만 하는 주객이 전도된 세상. 그래서 우연한 일탈, 착각이 주는 달콤함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곤 한다. 한편 착각이 빚어낸 씁쓸함은 내 앞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달콤한 여백을 길게 그려내기도 한다.

 

백수린의 소설 <폴링 인 폴>은 생소한 듯 하면서 결코 낯설지 않은 제목처럼 신세대 작가다운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의 혼란이 얼음이 녹아 물이라는 하나의 질료가 되는 순간 삶의 무게를 감내할 수 있는 뭔가가 존재함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한국어교육기관의 강사이자 삼십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여느 평범한 노처녀의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어느 날 제자로 들어온 재미교포 폴은 연상연하 커플이라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태의 주인공을 선물해 줄지도 몰랐다. 아니 폴은 내가 규칙적으로 단둘이 만나는 첫번째 남자였다. 사랑은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나는 언제부턴가 폴을 만날 때 어려 보이려고 포니테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혹스럽긴 하지만 사랑의 달콤함은 마약과도 같다는 것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망측(?)스럽기까지 하다.

 

살면서 누군가와 혀를 섞어본 일이 없었는데도, 폴의 발음에 대해 생각하다 잠이 드는 밤이면 나는 꿈속에서 내 혀에 감겨오는 혀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소스라쳐 잠에서 깨면 어쩌다 폴을 좋아하게 된 것인가 낭패스럽고 괴로웠다. -<폴링 인 폴> 중에서-

 

연상연하 커플이 낯설지 않은 세상이라고? 사회적 관습이란 여전히 높은 벽이다. 게다가 여자라는 현실에 노처녀라는 감투가 하나 더 얹어진다면 사랑이 주는 달콤함은 어느덧 추억의 빛바랜 사진처럼 씁쓸한 기억으로 다가오게 된다. 게다가 그 달콤했던 순간이 짝사랑이었다면, 나 혼자만 느낀 실연의 아픔이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인이 아니면 누나로라도 남고 싶은 나는 그래서 새파랗게 어린 남자아이 앞에서 쩔쩔매는 내가 한심하고 또 한심하다. <폴링 인 폴>은 이렇게 연하의 남자를 짝사랑하게 된 노처녀의 심리가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가슴 절절한 사연처럼 감성적인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삶이란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

 

이 소설의 주제는 소설 속 또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한 번 더 강조되고 있다. 전형적인액자소설로 전혀 별개의 이야기 같지만 주인공 나의 심리는 안팎을 넘나들며 착각이 주는 묘한 여운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 바깥 이야기가 착각이 주는 달콤함이 씁쓸함으로 변해가는 것이라면 안 이야기는 착각의 또 다른 형식인 오해가 주는 씁쓸함이 달콤한 기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재미교포인 폴이 한국인 아버지와 겪게 되는 액자 속 이야기의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들이다. 사실 따지자면 주인공 나와 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사랑도 문화 충격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바깥 이야기와 안 이야기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지만 그 교차점에는 묘한 어울림이 있다.

 

폴과 아버지의 갈등은 이민 1세대와 2세대들이 겪는 갈등의 전형이다. 한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 혼재된 이민가정의 단면이다. 가족을 위해서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극히 한국적인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폴에게는 그야말로 미션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다. 폴이 느끼는 문화적 충격은 아버지의 독특한 행동에서 혼란으로 다가온다. 자식이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는 정작 한국의 망령에 씐 사람처럼 한국어만 썼고 청국장을 끓여먹었고 교회 사람들 몰래 제사를 지냈다.

 

가족중심의 한국문화와 개인주의로 대표되는 서양문화의 갈등은 역사적 사실이 더해지면서 편견으로 발전해 간다. 주인공 나의 달콤한 기억을 씁쓸한 추억으로 만들어버린 폴의 연인인 일본 유학생 유리코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는 갈등은 아버지의 고향방문과 더불어 지낸 며칠 동안의 부대낌으로 해소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가게 된다.

 

아마도, 왜 영화감독의 꿈을 접었느냐 했던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을 것이다. 교포들의 역사는 marrative가 진부하죠. 어느 집의 역사든 다 다르지만 이야기로 만들고 나면 cliche예요. 처음에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건 내 이야기 하고 싶어서였는데, 너무 뻔해. 그래서 관뒀어요. -<폴링 인 폴> 중에서-

 

저자가 주인공 나의 짝사랑과 폴의 가족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킨 이유가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다르다는 차이, 그게 문화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고, 언어일 수도 있지만 그 다름을 극복하는 과정이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숨기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절실한 이야기들이 남에게는 진부한 그것으로 전락되고 말지만 그 갭을 매워주는 것이 요즘말로 하면 소통쯤에 해당하지 않을까.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고 조작된 일탈을 꿈꾸는 현실, 거창하게 연대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말하는 것으로 일탈은 제대로 현실에 용해될 것이다. 폴이 그를 닮은 듯 닮지 않은 사람들에 섞여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바라본 사라진 방향을 바라본 주인공 나의 시선은 독자인 나에 의해 조금은 엉뚱한 곳으로 길을 틀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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