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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한 달을 살기 위해 열한 달을 죽어 사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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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의 <일어서는 땅>/1986

                                                    

최근 주요 정당 대표들이 모두 여성들로 채워짐으로써 새 정치에 대한 바램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불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력들은 극과 극의 대비라 할 정도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당정치 역사상 처음일 것 같은 여성대표 시대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흔히 언급하는 에로스니 플라토닉이니 하는 단어들이 특정 상황을 아우르는 시각적이고 제한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면 모성()는 이들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가장 근원적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에로스니 플라토닉이니 하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 그것이라는 것은 그 속에 내재된 사랑 이상의 본능적 그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모성은 모성 그 자체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을 용서케도 하고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상도 분노로 들끓게 하기도 한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감동적이고 감성적인 코드가 모성애인 것이다.

 

문순태의 소설 <일어서는 땅>에서 바로 모성()의 기적과도 같은 힘을 보게 된다. 모성의 발현은 아픔을 고통으로 격상시키고 비극을 더 비극적이게 한다. 

중첩해서 되살아난 비극의 역사

 

박요셉의 아내이며 토마스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는 여름이 끝나는 무렵부터 이듬해 오월까지 정신병자처럼 넋을 잃고 있다가도, 아카시아꽃이 피기 시작하면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듯 그렇게 망각의 긴 잠에서 깨어나 아들 토마스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일어서는 땅> 중에서-

 

그날 이후 육 년 동안이나 반복된 아내의 일상은 이랬다. 한 달을 위해 열한 달을 죽어사는 아내. 어쩌면 아내의 이런 일상은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끝없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1980년 오월, 아카시아 꽃내음과 함께 사라진 아들 토마스를 찾는 그날까지. <일어서는 땅>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인 광주항쟁 당시 행방불명이 된 아들을 찾기 위한 한 어머니의 종교와도 같은 모성애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저자에게 그 때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날의 사건으로 겪게 되는 가족의 아픔을 상기시키고 파괴된 일상의 회복만이 종교적 숭고함을 갖는 것이다.

 

광주항쟁과 함께 박요셉 가족을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괴롭히는 사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948년 일어났던 여순반란사건이다. 박요셉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하고 있던 형을 여순반란사건 때 잃고 말았다. 소설은 아내 조마리아가 해마다 아카시아꽃이 필 때면 아들을 찾아 광주로 향하는 아내의 모습과 형을 찾아 남도 끝 조그만 항구도시를 배회하는 어머니를 오버랩시키면서 전개된다. 구두닦이 아들이 왜 총을 들었는지 모르는 아내와 당신의 아들이 좌익이요 우익이요 하는 질문에 우리 아들은 오른손잽이라고 말했던 어머니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은 오로지 아들일 뿐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런 세상을 알지도 못한다.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보는 것 뿐이다.

 

문순태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의 몰가치성을 얘기하면서 정작 소설의 배경은 이데올로기의 현장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저자는 각종 소설적 장치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일어서는 땅>의 소재이자 주제인 모성애도 바로 그런 저자의 의도가 담긴 소설적 장치라 할 수 있겠다.

종교로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

 

소설의 등장인물들 중에는 중요한 특징 한가지가 있다. 바로 카톨릭 세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요셉, 조마리아, 토마스인 가족의 이름 뿐만 아니라 토마스의 성당 친구인 프란체스카 등 이것은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인 동시에 종교로도 치유할 수 없는 비극의 깊이를 보여준다. 특히 해마다 오월이면 아들을 찾아 헤메던 아내가 다시 제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행동이 십자가를 항아리에 처박아 버리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은 이놈을 만나게 될 거로구만요. 내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 거예요.”

당신은 언제나 토마스를 찾아 나설 때마다 그렇게 말했지. 작년에도, 그 작년에도그랬다가 토마스를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서 십자가를 항아리 속에 처넣어 버리고선…” -<일어서는 땅> 중에서-

 

또 소설에서는 비극적 역사의 주범인 이데올로기를 무력화시키면서 이데올로기로 덧씌워진 사람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삶에 대한 뜨거운 투쟁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구두닦이 토마스가 구두통 대신 총을 메고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것을 가증스러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셔터가 내린 은행 문은 무엇 때문에 지키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은행의 금고 안에 많은 돈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바보 같은 소리에 나는 웃고 말았습니다. 토마스의 말로는 구두닦이를 해서 모은 자기 돈 육십만원도 그 은행의 금고 속에 있다고 했어요.”  

발단이야 뻔하죠. 꼭 그걸 말해야 아나요? 그러나 지금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싸우는 거겠죠.”
-<
일어서는 땅> 중에서-

 

한편 소설은 박요셉이 형의 일기장 내용을 회고하는 장면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비극적인 현대사의 씨앗이 일제 강점기 때문에 잉태되었음을 은연 중에 내비치고 있다. 아내의 마음 속에 서서히 일어서는 땅, 무등산은 토마스의 분신이자 아내를 살아있게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은 비극의 시대, 지금쯤 박요셉 부부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토마스가 어느 날 편지에 같이 보내온 <구두닦이>라는 시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나는 지금/십자가를 닦고 있어요/아버지가 아침마다/숫돌에 낫을 갈고/밤마다 어머니가 우물가에서/맑은 샘물을 퍼올려/누더기 헌옷들을/깨끗하게 빨아 말리듯/별처럼 빛나는 우리들의/꿈을 닦고 있어요/나의 꿈은/더러운 구두창이 아니고/서슬이 퍼런 아버지의 낫이며/낡은 누더기일지라도/부끄러움을 가리는/어머니의 흰 빨래이고 싶어요.

<이 포스팅과 관련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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