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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친구야, 사는 게 그렇게 힘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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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구의 <선소리>/1958년

블로그를 멀리 한지 벌써 넉달이 다 되어간다. '일일 일포스팅'이라는 나름의 원칙을 지켜오다 5월 중순 정확히 말하면 5월19일 이후로 포스팅도 건너뛰는 날이 많아졌고 내 블로그를 찾아준 이웃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 포스팅을 해보지만 안그래도 허접한 글에 먹물만 더 번지게 할 뿐이었다. 5월19일.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토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밝게 인사하고 헤어졌던 직장동료, 이 친구가 일요일부터 연락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결근이나 지각에 대해서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철두철미한 친구였던 터라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마침내 수요일 저녁 이 친구를 찾았다는 소식으로 찰나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어제(화요일) 한 줌의 재로 뿌려졌다는 비보를 접해야만 했다. 나이는 나보다 10살이나 아래였지만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그 친구를 보며 내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지곤 했는데 자살이라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세 달 네 달이 흘러갔다. 먹고 사는 데 급급해 봄날 선잠에 꾼 꿈마냥 기억 저 편으로 내동이쳐야만 했던 그 친구의 얼굴이 언뜻언뜻 되살아나면서 삶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된 채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이봉구의 소설 <선소리>을 읽다 문득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한 시대의 조류인양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하는 허무주의가 결코 이유없는 유행(?)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파도가 육지를 향해 달려들기 전에 바다 깊숙한 곳에서는 상상 이상의 무엇이 끊임없는 몸부림으로 밀물을 준비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허무주의의 종말론적 결론은 <자살론>의 저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의 말대로 사회적 병리현상이고 분명 원인이 되는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친구의 자살이 오랫동안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망우리 공동묘지 박인환 묘 앞에 있는 시비 '목마와 숙녀'   사진>문화일보

이봉구의 소설 <선소리>를 얼핏 읽으면 망우리 공동묘지 선소리꾼의 인생을 달관하며 사는 삶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인생 달관이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짙은 허무주의가 선소리꾼을 휘감고 있다. 주인공 '나'는 시인 박인환의 일주년을 맞아 박인환이 묻혀있는 망우리(忘憂里)를 찾았다가 워헝달공의 선소리꾼을 만나 죽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시름을 잊는 곳이라서 아니 시름을 잊어버리게 되는 곳이라서 망우리인가, 이름을 지어놓고도 누가 그 이름을 붙였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시들한 봄이 오고 봄이 가고 가을이 깊는 속에서 망우리는 무덤만 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선소리> 중에서-

주검의 무덤을 다져주는 일로 평생을 살아온 선소리꾼에게 죽음은 단순한 이승과의 이별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불가의 말대로 보통 사람인 주인공 '나'의 죽음에 대한 상식에 일대 혼란을 일으킨다.

"뭐? 잠들었다고요? 말이 없이 묻혀 있으니까 잠든 줄로만 아시는구려. 허, 기찬 일이요. 뜬눈으로 있을 터인데 잠이 들었다? 뭐, 그리고 듣기가 괴롭다고? 아직도 멀었어……" -<선소리> 중에서-

그러나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한 선소리꾼의 이 말은 허무주의에 대한 강한 반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선소리꾼은 넋을 잃다시피 애간장 녹이는 선소리 달구질을 하며 주검이 묻힌 흙을 정성껏 다지고는 술을 마시다 갑자기 쓰러져 죽고만다. 사인은 과음과 과도한 충격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이 소설이 1958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고향이 황해도인 선소리꾼에게 하루하루가 충격이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향민으로서 분단과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어온 선소리꾼은 당시를 살아가던 보통 사람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큰 전쟁이 있은 후에 꼭 찾아오는 '허무주의'라는 사회현상을 고발하고 이런 허무주의로 나타나는 죽음이 단순한 개인사가 아님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이런 저자의 의도는 감성적인 시를 주로 썼던 박인환을 등장시킴으로써 좀 더 분명해 진다.

꽃부리도 넋에 젖어 피기를 주저한다는 망우리 묘지에 유록 조끼는 갑사 조끼를 입은 채 누워서 오늘도 북소리에 장단 맞추어 신명나는 구슬픈 선소리와 발돋음 소리를 듣고 있으리라. -<선소리> 중에서-

최근 우리사회는 '자살 공화국'이라 불릴만큼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어느 통계를 보니 자살율 세계2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는 요즘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진지한 고민이 없다. 다시 뒤르켐의 말을 언급하자면 자살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국가나 집단이 제어하지 못한 개인의 도덕적 지각이 무너진 상태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즉 자살율이 급증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와 사회는 직무유기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자살 소식을 접하면 으례 그럴 용기로 왜 살지 못하냐고 오히려 죽은 이를 타박한다. 과연 그럴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을 한번이라도 지켜보기나 했을까.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떠나기 며칠 전부터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러나 해도해도 몸에 익지 않은 야간일 탓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왔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친구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면 지금쯤 무뚝뚝하지만 인정많은 그 친구와 어색한 대화라도 하고 있을텐데...나 또한 동료로서, 형으로서, 친구로서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 친구를 떠나 보내고 이제야 물어본다.

"친구야, 사는 게 그렇게 힘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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