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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안철수 교수의 양보가 아름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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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의 <창>/1946년

해방으로 황국신민이 되지 못해 한탄한 이광수를 말하냐고? 일본 제국주의가 항복한 날아침까지 총독부에 찾아가 일본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본 김동인을 두고 한 말이냐고? 이 도발적인(?) 제목을 그들만의 일로 단순화시킨다면 우리는 여전히 해방을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궁금증은 잠시 접고 최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시의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로 화제를 돌려보자.

 

개표 가능한 투표율 33.3%에 한참 못 미치는 25.7%의 투표율을 두고 여도 야도 제각기 승리라고 주장하는 꼴을 보면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한나라당은 비록 개표함은 열지 못했지만 투표한 25.7%의 서울시민은 한나라당 적극 지지층으로 지방선거나 총선의 투표율을 감안하면 자당이 압승할 수 있는 수치라느니 하고 민주당은 투표하지 않은 과반수의 서울시민은 반한나라당 성향이라며 앞으로 실시될 선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단다. 옛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전인수라고 했지 싶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똥물마저도 김칫국 마시듯 하는 모습이 참 가관이다.

 

물론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를 정치적으로 변질시키긴 했지만 투표한 25.7%와 투표하지 않은 74.7%의 서울시민들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분법적 사고를 훨씬 뛰어넘은 다양한 생각들로 투표여부를 결정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생각들을 인정하고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당장의 유리하고 불리한 국면은 하루 아침에 전세가 역전되는 국면을 맞을 게 뻔하다. 1946년 발표된 이선희의 소설 <창>은 집단적이고 국가주의적 사고에 빠진 나머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예외적이고 의외의 설정을 통해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물론 민주주의란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에 저자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의 혼란을 타개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 안철수 교수야말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사진>연합뉴스

해방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소설 <창>은 김사백, 김사연 형제가 삼팔선 북쪽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대표되는 토지개혁에 대한 갈등을 다루고 있다. 한편 소설의 주인공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동생 김사연보다는 소지주로서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형 김사백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북쪽의 토지개혁이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의외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저자의 가치관이 개입된 소설은 아닌 듯 하다. 이선희는 소설 <창>이 발표된 해에 월북한 작가이기도 하다. 

소설은 시작부터 해방, 광복에 대한 통념을 깨고 있다. 아니 해방에 대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정의가 아닌 소시민들의 솔직담백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은 조선독립에 대한 환희보다는 징용을 면할 수 있다는 것과 만리타국에 흩어져 있는 가족과 이웃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에 먼저 기쁘고 즐거울 뿐이다. 

"인제 무시기구 무시기구 병정 안 나가게 됐으니 좋다."
"야, 선냇집 큰아들이랑 수채동집 창수랑 병정 나갔든 게 오겠구나. 이 동내서 모두 몇이나 나갔능가?" -<창> 중에서-

한편 무인가 학교 교사였던 김사백은 해방으로 정식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차 있지만 토지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평생을 모아 사둔 작은 논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에 해방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결국 김사백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형 김사백과 이념적인 대척점에 서 있던 동생 김사연은 형의 장례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형의 일터였던 학원을 지나치면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을 바라보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사연의 어둡던 마음이 웬일인지 평안해진다.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서 걸었다. 우리들의 앞날도 누가 켠지도 모르는 그 창문의 빛처럼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창> 중에서-

<창>에서 저자의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에 앞장섰던 김사연의 후회요 이념적 전향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월북작가라는 저자의 이력을 볼 때 그런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질 게 분명하다. 오히려 김사연이 해방과 토지개혁을 대하는 자신과 다른 생각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해석이 옳을 듯 하다. 요즘 말로 하자면 다양성을 인정하게 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김사연은 자신만의 맹목적인 신념에 매몰되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일종의 심리적 해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남쪽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론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겠다. 저자는 반목과 대립만이 존재했던 해방공간이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거듭나기를를 염원하지는 않았을까. 새로운 사회적 관계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지싶다.

5%에게 양보한 50%가 아름다운 이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설명하는 다양한 정의들의 핵심이다. 서울시의 주민투표가 끝난 후 급부상한 인물이 바로 안철수 교수다. 그는 10월에 있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 여부를 밝히기도 전에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여야 누구와도 맞붙어도 50% 이상의 지지율로 출마선언만 하면 서울시장은 마치 따논 당상처럼 보였다.

누가 그러더라. 안철수는 성인군자라고! 그는 기성 정치인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또 한번 그의 진면목으로 여론을 흥분시켰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5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보이던 그가 5% 안팎의 지지율에 머물고 있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름다운 양보'라고 한다. 그는 정말 성인군자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며 실천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 시민이다. 그를 이념적 스펙트럼이 어디로 뻗쳐있는지에만 혈안이 돼있는 정치인들이 난무한 사회에서 그의 양보가 아름다운 이유다.

50%의 지지율을 단순히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지지로만 생각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다. 요즘 정치인들처럼 말이다. 그는 50%의 지지율 속에서 무상급식에 대한 서울시 주민투표와 서울시장 선거, 이를 둘러싼 정치권과 더 나아가 요즘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다양한 생각들을 돌이켜보고 또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그런 다양한 욕구와 기대들을 담아낼 수 있는 적임자로 자신보다는 경쟁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또는 다양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독단과 독선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 아닌가. '아름다운 양보'. 참 아름다운 말이다. 

백 명이 모이면 백 가지 생각도 따라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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