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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분지필화사건과 미국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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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현의 <분지>/1965년

1965년 5월8일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조국통일》에 한 편의 소설이 실렸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는 부랴부랴 이 소설의 저자를 긴급체포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저자에게 이 소설이 북한이 보내준 원고가 아니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며칠 후 구속적부심에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석방되었지만 1년 후 반공법 위반혐의로 다시 기소되었다. 한승헌 변호사 등이 무료변론에 나섰고 안수길과 이어령 등 동료문인들이 피고인측 증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또 《창작과 비평》창간 편집인이기도 했던 문학 평론가 백낙청은 저자의 구속에 항의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은 6개월의 실형으로 마무리되었고 피고인이었던 이 소설의 저자는 1967년 선고유예 판결로 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분지필화사건'이다. 남정현의 소설 <분지>를 둘러싼 이 필화사건은 문학적 논쟁은 물론 '혈맹' 미국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태동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 전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중에게 채 알려지기도 전에 북한이 개입(?)됨으로써 세간의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국가기관이 개입했고 저자가 폭로하고자 했던 미국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을 풍자하다

소설 <분지>가 당시 권력층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는 북한 언론이 보도했다는 이유 말고도 파격적인 소재와 주제가 한 몫 했다. 주인공 홍만수는 지금 향미산에 포위되어 있다. 20분 후면 향미산은 검붉은 화염 속에 사라져갈 것이다. 홍만수는 미 제 엑스 사단의 스피드 상사 부인을 겁탈한 강간범으로 향미산까지 쫓겨왔다. 전세계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한다는 미국은 신이 잘못 점지하여 이 세상에 흘린 오물, 홍만수를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향미산을 완전히 폭발시킬 계획이다.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홍만수는 왜 신이 흘린 오물을 자처하며 강간범이 되었을까?

소설은 홍만수가 죽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왜 향미산까지 쫓겨왔으며 결코 미국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향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미군은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 해방되던 날 항일운동을 했던 남편을 기다리며 해방군 미국의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섰던 어머니는 미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그 충격에 미쳐서 죽고만다. 어머니가 강간의 충격으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음부를 드러내고 자해를 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홍만수 가족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여동생마저 미군의 첩이 되어 온갖 폭언과 욕설,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홍만수가 스피드 상사의 부인 미세스 스피드를 강간한 것도 복수심의 발로였다. 

저자는 초강대국 미국의 폭력성을 촌철살인의 풍자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국은 향미산 둘레에 무려 일만여를 헤아리는 각종 포문과 미사일을 배치하고 미군 중에서도 가장 민첩하고 정확한 기동력을 자랑한다는 미 제 엑스 사단 장병들이 향미산을 포위하고 있다. 또 미국은 지금의 무력 동원이 세계인의 생명과 재산,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대대적인 홍보방송을 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홍만수의 육체와 혼백까지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2~3억불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군비를 지출한다. 

저자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진지한 고민보다는 다소 감정적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소설 <분지>는 미국을 대하는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대문학사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


미국은 한국사회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보여줬던 미국의 역할은 아직까지도 미국이 선이라는 주류사회의 확고한 이념이 되고 있다. 소설 <분지>에 대해 미국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여를 지적하긴 했지만 저자는 미국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우리사회의 가치체계를 왜곡시키고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부르짖다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란 것도 알고요. 오로지 정치자금을 제공한 몇몇 분들의 이익과 번영만을 위해서 입법이며 행정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분지> 중에서-

또 미국의 자본과 힘에 의한 산업화가 미국과의 사대적 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저자의 경고는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한미관계를 고민해 봐야 할 숙제를 안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 곧 팬타곤 당국이 만천하에 천명한 대로 기계의 점검이 끝나는, 앞으로 일 분 후면 요란한 폭음과 함께 이 향미산은 온통 불덩얼가 되어 꽃잎처럼 흩어질 테지요. 그리고 흩어진 자리엔 이방인들의 그 넘치는 성욕과 식욕을 시중들기 위하여 또 하나의 고층빌딩이 아담하게 세월질지도 모릅니다. -<분지> 중에서-

앞서 언급했던 대로 소설의 제목 '분지'는 미국이 홍만수를 표현한 '신이 버린 오물'이다. 또 홍만수가 숨어들어간 '향미산'은 '미국을 바라보는' 또는 '미국을 우러러보는 산'이다. 한편 이 단어들은 저자의 미국에 대한 시선을 역설적이고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지필화사건이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듯이 미국을 바라보는 미국을 대하는 태도 또한 개인적인 호불호의 자유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류의 시각과는 다른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또다른 시선은 미국의 독재정권 비호와 개입인지 방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왜곡되고 모순된 한국사회의 그늘에 미국이 깊숙히 개입되어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최근 미국의 과거 고엽제 살포 은폐와 바로 어제 동해 대신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에서도 보았듯이 미국을 맹목적인 '혈맹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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