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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입영통지서는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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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규(1934~1994)<포인트>/「문학예술」14(1956.5)

 

306보충대에 입소하는 날 아침 머리를 깎았다. 그날만큼은 촌스럽다며 발길을 끊은지 오래된 이발소를 찾았다. 이발소여야 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마지막 얼굴(?)을 그토록 유심히 바라본 적은 없었다. 애써 웃어보지만 거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흰옷의 정체가 이내 몸을 얼게 하고 말았다. 바리깡이 쓸고간 자리는 횡하니 신작로가 생기고 한움큼씩 바닥에 떨어진 나의 자화상은 불에 그을린 듯 새까만 잔디밭이 되었다. 거울 속의 낯선 그는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듯 나를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슬피 바라보았다.

흑백필름이라도 돌리는 것일까? 길지 않은, 결코 순탄했던 그의 인생이 얼키성키 가시밭처럼 거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이 앞에는 무슨 운명이 놓여있길래 저 깊은 심연에 가라앉은 기억마저 애써 건져올리려 하는 것일까? 거울 속 그이와 나는 허공 속에 포옹을 하고는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 대체 너는 누구냐? 손 마디마디에 전해지는 따끔따끔한 감촉을 느끼고서야 거울 속 그이와 내가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여기 낯선 작가의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최상규의 소설 <포인트> 이 땅에 남자로 태어난 죄(?)로 내 이야기, 우리들 이야기기 되고 말았다. 아니 이 땅을 살았던 또는 살아가고 있는 누구나가 경험했음직한 이야기다. 소설 <포인트>는 1956년 『문학예술』에 추천된 최상규의 처녀작이기도 하다. '포인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인생의 전환점은 군대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징집영장 즉 입영통지서를 받던 날을 말한다. 징집영장을 받고 헤어져야만 하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거대한 운명 앞에 개인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섬세한 심리묘사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선택의 여지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운명 앞에 또는 한 사회의 집단적 요구 앞에 개인의 삶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 <포인트>다.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관찰자적 입장에서 묘사하고 있지만 탁월한 심리묘사는 주인공과 저자의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포인트>의 주인공은 돈없는 작가다.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는 아내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이 부부 앞에 그날 징집영장이 날라왔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 주인공은 아내를 홀로 두고 떠날 수 없다. 사실 이 부부는 정식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아내의 어머니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마지막으로 사랑을 하고 싶은 거다. 무일푼인 그는 아버지의 유산인 책 몇 권을 헌책방에 팔아 돈을 마련한다. 어제와 달라질 것 없는 오늘인데 입영통지서 한 장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고 만 것이다.

 

저자는 입영통지서를 받은 주인공의 초조하고 긴박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반 호흡도 안되는 짧은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숨가쁜 주인공과 일체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절정에 치달은 긴장감을 해소시켜주는 효과도 있다. 

 

아아 할아버지여. 돈이나 어서 줍쇼. 할아버지가 돈을 꺼내 세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생전 은행에는 가보지도 안했나보다. 빨리 돈을 세는 것이 부럽지도 않은가보다. 어쩌면 저렇게도 느릴까. 그는 할아버지를 붙들고 늘어지고 싶다. 결국 할아버지는 돈을 건넨다. 그는 받아 넣는다. -<포인트> 중에서-

헌책방에서 돈을 바꿔 아내에게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에게 주인 아저씨의 위로는 이내 성가신 참견일 뿐이다.

굿바이. 굿바이. 그만 가. 이놈의 아저씨야. 아내가 방에서 나왔다. 비감한 표정이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포인트> 중에서-

한국사회에서 군대는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다. 병역관련 의혹으로 유력한 대선주자가 낙마하기도 하고  어느 연예인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추방 아닌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로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한 이들도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앞에 개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대응해 나간다. <포인트>의 주인공도 징집영장이라는 운명 앞에 끊임없는 자기분열을 거듭하지만 결국에는 '오늘'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다. 

그렇다. 그렇다. 그는 문득 기쁘기 시작했다. 나도 어른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느꼈다. 내가 왜 이렇게 점잖으냐 왜 이렇게 너그러우냐 했더니 바로 내가 어른이 된 때문이다. 나도 어른이기 때문이다. -<포인트> 중에서-

소설 <포인트>는 겨울의 스산함이 징집영장 받던 그날의 비애를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과연 이들의 운명은, 이들은 선택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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