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육체에 대한 배타적 권리로써의 사랑을 거부하다

반응형

이상<봉별기>/1936년

 

본웅은 친구이자 청년시인인 이상을 위해 사랑을 포기할만큼 헌신적이다. 본웅은 만성결핵을 앓고 있는 이상을 위해 요양처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이상은 그곳에서 금홍이라는 기생에 빠져 난잡한 생활을 한다. 어느날 이상은 시 '오감도'를 두고 문학적 위기를 맞으며 금홍과 다투고 헤어지게 된다. 본웅은 금홍과의 이별 이후 점점 황폐해지는 친구 이상을 위해 금홍을 찾아가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이상은 죽었고 본웅은 죽을 때까지 금홍을 잊지 못했던 이상의 유품을 들고 다시 금홍을 찾는다.

1995년 개봉된 영화 <금홍아 금홍아>는 이상의 소설 <봉별기>를 영화적으로 각색했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한다. 주인공 이상과 금홍 그리고 본웅(소설에서는 K군). 또 이들은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이상의 소설을 특징짓는 부분 중 하나다. 그러나 <봉별기>가 이상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하나 주인공 이상은 작가 자신이라기보다 소설 속 설정으로 보는 게 타당할 듯 싶다. 

<봉별기>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 이상과 금홍의 만남과 헤어짐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상의 소설 중 가장 평이한 문장으로 씌여졌다는 평가를 받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여전히 난해한 소설이다. 특히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와 동침하게 하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음하도록 방을 비워주기도 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금홍의 반복된 만남과 이별에는 어떤 내적 갈등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요즘으로 치면 막장도 이런 막장은 없다. 그렇다면 이상은 왜 문란한 생활을 해야만 했을까? 저자 이상은 주인공 이상의 난잡스런 행동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 했던 것일까?


살아있다는 증거로서의 만남과 헤어짐

먼저 폐결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이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B라는 신개지의 온천에서 요양중인 이상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 일인가! 살기 위해 약을 먹고 차가운 등불 아래 서면 아직 펴보지도 못한 청춘이 억울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삶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만난 이가 바로 기생 금홍이다.

한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또 헤어진다는 것, 죽음을 앞둔 이상에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만남과 헤어짐의 본질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상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어미의 뱃속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끊임없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때로는 환희에 차고 때로는 눈물에 젖고, 평생을 살면서 가장 역동적인 순간이 그것이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자기 최면인지도 모른다.

지어 가지고 온 약은 집어치우고 나는 전혀 금홍이를 사랑하는데만 골몰했다. 못난 소린 듯하나 사랑의 힘으로 각혈이 다 멈췄으니까. 나는 금홍에게 놀음채를 주지 않았다. 왜? 날마다 밤마다 금홍이가 내 방에 있거나 내가 금홍이 방에 있거나 했기 때문에 -<봉별기> 중에서-

사랑은 육체적 소유가 아니다

사랑을 말할 때 흔히 에로스적 사랑과 플라토닉 사랑을 예로 들곤 한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쯤 되겠다. 사랑에 대한 이 구분은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서 비롯되었다. 고상한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은 모름지기 정신적 사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뒤로는 육체를 탐닉하면서 말이다. 플라토닉 사랑을 정신적 사랑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신적 사랑에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플라톤도 사실은 육체적 사랑을 정신적 사랑과 구분하지 않았다. 다만 호사가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고 있을 뿐...

이상은 육체에 대한 배타적 권리로써의 사랑을 강하게 거부한다. 이 또한 육체적 사랑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랑이 이성의 육체를 소유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일게다. 이성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세상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고 그게 비록 간음일지라도 또 하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쉬 뜨거워졌다 식어버리는 현대인의 냄비같은 사랑에 일침을 가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사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강한 거부와 허무감이 느껴진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에게 육체적 사랑이니 정신적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산 자의 사치일 뿐이다.

금홍이는 나를 내 나태한 생활에서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우정(일부러) 간음하였다고 나는 호의로 해석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흔히 있는 아내다운 예의를 지키는 체해본 것은 금홍이로서 말하자면 천려(千慮)의 일실(一失) 아닐 수 없다. -<봉별기> 중에서-

봉별(逢別)을 반복해 온 이상과 금홍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만남과 이별의 순간에 금홍이가 부른 구슬픈 창가는 소설 전체를 흐르는 삶에 대한 허무의식이 짙게 배어나온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버려라 운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