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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미완성 교향곡에 숨겨진 사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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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1902~1972)의 <아네모네의 마담>/「조광」3호(1936.1)

키프로스의 왕 키뉘라스에게는 스뮈르나라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을 어찌나 예뻐했던지 키뉘라스왕은 딸 스뮈르나를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의 아름다움에 견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아프로디테가 누군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 최고의 미인으로 선택한 신이 바로 아프로디테였다. 그러니 원조 '공주병' 아프로디테가 스뮈르나를 가만둘 리 없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불러 스뮈르나가 처음 본 남자에게 견딜 수 없는 사랑에 빠지도록 스뮈르나에게 황금 화살을 쏘게 했다. 이 어찌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에로스의 황금 화살을 맞은 스뮈르나가 처음 본 남자는 다름아닌 아버지 키뉘라스왕이었다. 이 사건은 스뮈르나뿐만 아니라 아프로디테에게도 불행의 시작이었다.

에로스의 황금 화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해야만 했던 스뮈르나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잠든 틈을 타 동침을 하고는 아이를 임신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키뉘라스왕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창피하고 분했던 키뉘라스왕이 스뮈르나의 목을 베려는 순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프로디테는 스뮈르나를 몰약나무로 변신시켜 죽음으로부터 구해준다. 자신의 질투로 인해 생긴 일인지라 아프로디테가 비록 신이었지만 자신 때문에 죽음의 기로에 선 스뮈르나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스뮈르나는 임신한 채 몰약나무가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훗날 아프로디테는 이 몰약나무의 껍질을 찢어 달이 덜 찬 아기를 꺼냈으니 이 아기가 바로 아도니스였다.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의 온갖 정성으로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다. 스뮈르나를 질투한 업보였을까? 아프로디테는 그만 멋진 청년 아도니스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신들의 세계는 알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아프로디테를 사랑했던 전쟁의 신 아레스는 질투심에 불탄 나머지 멧돼지로 둔갑해서는 아도니스를 죽이고 만 것이다. 애인의 주검을 안고 슬퍼하던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의 피에 넥타르(신들이 마시는 술)를 뿌려 꽃으로 피어나게 했다. 이 꽃이 바로 '아네모네'라고 한다.


느닷없이 왠 신화 이야기냐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더 유명한 주요섭의 소설 <아네모네의 마담>에는 제목도 제목이거니와 남녀간에 벌어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틋함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나는 신화까지 들먹이며 그들의 사랑을 소개하려는 것일까? 그들의 사랑은 이러했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

찻집 아네모네의 마담 영숙은 어느날 창백한 얼굴의 대학생 손님에게서 야릇한 감정을 느낀다. 그 대학생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달라 부탁하고는 아네모네에 있는 내내 영숙을 집어삼킬 듯이 바라본다.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라는데 그 때는 여심을 사로잡는 남자만의 매력이 따로 있었나 보다. 영숙은 애수에 찬 대학생의 눈을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 대학생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영숙의 행동에도 시나브로 변화가 오게 된다.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달라는 쪽지 외에는 말이 없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해볼까 싶어 귀고리를 달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는 그 대학생이 올 때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소리판을 준비한다. 그는 묵묵부답. 그러나 여전히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영숙이다. 영숙은 안타깝다. '자기 자신이 용기가 없으면 저 학생을 통해서라도 내게 말 한마디 해주면 될 것을!' 자기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말을 하지 못하는 그 대학생이 안타까워 귀고리를 찰싹거리며 관심을 끌어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일 뿐 두 팔 사이에 얼굴만 파묻고 있다.

이 용기없는 대학생이 어느날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는 친구에 의해 아네모네 찻집을 끌려 나갔다. 이 소란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소리판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

아네모네 찻집을 찾은 대학생은 늘 그녀만 바라볼 뿐 말이 없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만을 들을 뿐 그 흔하디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알고 있다. 연상의 여인 게다가 유부녀인 그녀를 사랑한다는 게 축복받지 못할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애수어린 눈으로 그녀만 바라볼 뿐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을 것이다.

그는 이 사회가 무섭다. 매음같은 더러운 성관계는 인정하면서 남편 외의 딴 사람에게서 한 사람이 단 한 번만 가져볼 수 있는 그 고귀한 첫사랑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할 때 우리 사회는 그 사랑을 더럽다고 낙인찍어 버린다. 더러운 기생과의 외도는 묵인하면서도 순결하고 고귀한 사랑은 그 대상이 다른 남자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생과의 외도보다도 더 나쁜 일처럼 매도해 버리는 이 사회가 무섭다.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을까 여느때처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듣고 있던 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반전

그들의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미완성 교향곡'은 영숙과 그 대학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하고 만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사실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대학생이 아네모네에 올 때마다 바라본 것은 영숙이 아닌 영숙의 뒤에 걸린 '모나리자' 그림이었다.
 
대학생의 그녀는 웃는 모습이 모나리자와 닮은 자기가 다니던 대학교 교수의 부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 애인 사진 대신 모나리자 그림을 걸어두었지만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아네모네에 들러 그림도 보고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며 혼란한 마음을 추스리곤 했던 것이다. 이런 그를 보며 영숙이 오해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찻집 아네모네에서는 '미완성 교향곡' 대신 예전처럼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대학생의 풋풋한 사랑과 이를 오해한 찻집 마담의 심경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 주요섭의 <아네모네의 마담>은 아네모네, 미완성 교향곡 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암시하는 장치들과 극적 반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긴장감을 고조시켜 주는 소설이다. 주요섭의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은 말했다. 사랑이란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들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곳을 바라보지는 못할지언정 서로 바라보는 시선마저도 어긋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문득 모 가수의 노랫말이 귓가를 맴돈다.

'사랑해선 안될 게 너무 많아, 그래서 더욱 슬퍼지는 것같아. 그 중에서 가장 슬픈 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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