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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어느날 당신에게 10억이 생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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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의 <원고료 이백원>/1935년

아무리 '통큰○○○'이 유행이라지만 1억원도 아니고 10억원 이라니 통이 커도 너무 크다. 사실 어느 때부터인지 액수만 있을 뿐 형체도 없는 돈의 가치가  저잣거리 필부의 술안주가 되어버렸다. 허상에 불과한 돈의 가치는 팍팍한 우리네 삶을 그 액수만큼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도 10억원이라면 아무리 돈의 가치가 아무리 땅에 떨어진 오늘이라도 결코 만만하게 볼 금액은 아니겠지 싶다. 어느날 당신에게 10억원이 생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먼저 힘들었던 과거를 들추어내어  내게 들어온 10억원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들 것이다. 변변한 도시락 하나 챙겨갈 형편이 못되어 맹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학창시절, 양초가 타들어가는 것 처럼 고단한 몸 녹초가 되도록 밥먹듯 반복했던 야근의 기억, 병원비가 없어 생사의 기로에 선 아이를 힘없이 바라봐야만 했던 가슴시린 기억 등 어느날 찾아온 횡재 앞에 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때로 과장되기도 한다. 이런 기억의 과정을 통해 10억원이라는 돈은 오로지 나와 내 가족의 미래를 담보해 줄 든든한 밑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넓은 정원이 있고 아침 햇살에 잠을 깨는 동화 속 집을 꿈꾸고 뚜껑없는 자동차로 끝없는 황야를 으시대며 질주하고픈 상상을 하게 된다. 인지상정이다. 

강경애의 소설 『원고료 이백 원』은 편지 형식을 통해 이런 소시민성에 젖어있는 자신의 부끄러운 면을 고백하고 주변을 돌아보자는 강한 메세지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강경애의 자전적 소설로 실제로 <인간문제>라는 글을 기고하고 받은 연재료를 둘러싼 남편과의 갈등을 통해 당시 지식인 사회에 만연해 있던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제의 사상탄압과 문화정책이 극성을 부리던 1930년대 중반 이후 카프의 해산으로 현실참여적 문학운동이 약화되었고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이 잇따르면서 지식인들의 사회운동은 그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저자 강경애는 이처럼 지식인 사회에 번져가는 개인주의에 일침을 가하고 고달픈 삶을 이어가고 있는 당시 민중들과 연대의 끈을 놓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강경애가 카프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들은 경향문학적 성격을 짙게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백 원'이라는 돈의 가치가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이백 원은 남편의 동지였던 웅호의 심장병을 고치고 남편을 감옥에 보내고 힘겹게 살고 있는 홍식의 아내와 그 자식을 구하기에 충분한 돈이다. 남편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나 또한 돈이 오기 전까지는 그럴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막상 내 손에 돈을 쥐고보니 그런 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저자는 당시 지식인의 개인주의적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나는 이같이 뜻밖의 말에 앞이 아뜩해지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구나. 그리고 나를 쳐다보는 남편의 그 얼굴이 금시로 개 모양 같고 또 그 눈이 예전 소 눈깔 같더구나. -『원고료 이백 원』 중에서-

저자는 실제 자신의 현실이기도 했던 당시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참혹한 생활을 떠올리며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 

K야, 너는 책상 위에서 배운 그 지식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제야말로 실천으로 말미암아 참된 지식을 얻어야 할 때이다. 그리하여 너는 오직 너의 사회적 가치를 향상시킴에 힘써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를 떠난 그야말로 교환가치를 향상시킴에만 몰두한다면 너는 낙오자요, 퇴패자이다.  -『원고료 이백 원』 중에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와는 별개로 소설에서 내가 남편과 갈등을 겪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가부장적 전근대적인 인습은 읽는 내내 불편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남편의 폭행에서 어떤 정당한 근거를 찾아내기가 어렵고 이를 이유로 가출한 아내에게  여자이기에 받아야 할 사회적 비난은 남편과 화해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니 말이다.

강경애의 소설 『원고료 이백 원』은 1930년대가 아닌 21세기 우리 사회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어느날 나에게 또는 당신에게 10억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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