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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성탄절 짜장면에 얽힌 자매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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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박태원의 『성탄제』/「여성」21호(1937.12)/창비사 펴냄

소위 아이돌 그룹이 노래하는 사랑이란 남녀간의 사랑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사랑을 대하는 태도 또한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빠른 리듬에 춤까지 곁들여져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오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세태 속에 짜장면을 매개로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어머니의 사랑을 애잔하게 노래해 새삼 신선하게 다가온 아이돌 그룹이 있었다. 이제는 추억의 아이돌 그룹으로 밀려났지만 그룹 God어머니께는 지금 들어도 눈물이 와락 쏟아질 만큼 우리네 어머니만의 독특한 사랑 표현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난 때문에 라면만 먹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졸라 짜장면을 먹던 나는 더 이상의 행복은 없었다. 그러나 짜장면이 싫다며 드시지 않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사랑을 나이를 먹고서야 알았다는 이 노래는 뮤직 비디오와 함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여기 짜장면에 얽힌 슬픈 사랑이 하나 더 있다. 자매 지간인 영이와 순이, 그들은 자주도 가족들에게 청요리집에서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그러나 동생 순이는 언니 영이가 시킨 짜장면은 더럽다며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언니 영이는 달랐다. 동생이 시킨 짜장면을 맛있게 먹을 작정이다. 그러면서도 영이는 눈물을 흘렸다. 영이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1937년 「여성」21호에 발표된 박태원의 소설 『성탄제』에는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가난과 가난이 빚어낸 눈물 젖은 짜장면의 애틋한 사연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잔잔하게 그려지고 있다.

 


대물림 되는 가난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니 있었다. 민중들이 고난한 삶을 극복해 내려는의지이자 신분상승에 대한 열렬한 욕구를 상징하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이 속담은 차츰 민중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부모의 학력과 재산은 아이의 미래와 정비례한 그래프를 그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한 게임 속에 개천에서 아무리 용 써봐야 이무기일 뿐이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주겠다는 지도자는 장막 뒤에 숨어서는 가난의 대물림을 고착화시켜 그들만의 사회를 꿈꾸고 있다.

 

소설 『성탄제』에서 추억의 음식 짜장면이 타락의 상징이 되는 것도 대물림 되는 가난의 사슬을 고착화시키는 사회구조의 일면이 만들어낸 슬픈 풍경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카페 여급이 된 영이, 그녀는 숙명과도 같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급기야 매춘까지 서슴지 않는 도덕적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게다가 매춘의 장소가 집이라는 설정은 가히 충격적이다. 다행히 그녀의 타락을 멈추게 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뱃속에 들어선 아이였다. 아이의 아버지를 알아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가난이 끝날 수는 없었다. 잠시 아이를 핑계로 가족의 생계에서 자유로와진 영이는 또 다른 타락을 목격하게 된다.

 

부모의 암묵적 동의와는 달리 늘 영이의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동생 순이, 순이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은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고는 하나 이 가족이 단 하루라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저녁 순이는 영이가 그랬던 것처럼 사내를 끌고 들어왔다. 영이는 곁에 드러누운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바라보지만 그들은 놀라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영이는 사내를 집으로 끌고 들어온 이튿날 아침이면 사내를 졸라 가족 수대로 짜장면을 시키곤 했다.

 

너마저 집안 식구에게 짜장면을 해다 주게 됐니? 너마저 너마저…’ -『성탄제』 중에서-

 

소극적 휴머니즘

 

제목 성탄제는 이 가족의 경제적 빈곤과 자매의 도덕적 타락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성탄이 가지는 구원이라는 의미는 저자가 이 가족에 대해 가지는 비애와 연민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효과적인 장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영이의 기도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영이와 순이가 사내를 졸라 가족에게 시켜 주었던 짜장면을 떠올리면 영이의 동생 순이에 대한 단순한 비아냥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 거룩한 밤에 주여! 바라옵건대 길을 잃은 양들에게도 안식을 주옵소서. 아멘?” -『성탄제』 중에서-

  

다만 소설 첫머리에 나타나는 영이의 동생에 대한 비아냥은 시간적으로 소설 끝의 바로 앞 시간대로 순이가 남자를 데려온 순간에 느끼는 영이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영이의 이런 감정은 소설 말미에서 다음날 먹게 될 짜장면을 연상하며 자신의 전철을 밟고 있는 동생에 대한 슬픔과 연민, 사랑으로 변화한다.    

 

저자 박태원은 『성탄제』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궁핍한 생활과 그로 인한 도덕적 타락을 소재로 다루고는 있으나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본격적으로 파헤치지는 못한다. 자매가 타락해 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겪는 자매간 갈등만을 나열할 뿐 이 자매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분노는 기껏 가족에서 머물고 만다. <구인회>에 참여하는 등 당시 카프문학에 반기를 든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저자의 한계로 보인다.

 

이태준과 함께 한국 근대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저자 박태원의 소극적 휴머니즘은 다른 소설에서도 계속된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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