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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소설 '농군'이 친일논란에 휩싸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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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태준의 『농군』/「문장」임시증간 창작32인집(1939.7)/창비사 펴냄

창권이네 가족은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들과는 동떨어져 보이게 창백한 아내 이렇게 넷뿐이다
. 그들은 고향 강원도를 등지고 장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현재 이 가족에게는 밭 판 돈 삼백이십 원이 전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만주의 쟝쟈워푸라는 곳이다. 창권이가 다니던 보통학교 교사였던 황채심의 권유로 이곳 이역만리 만주땅에 한 가닥 희망을 일구려 하고 있다.

 

쟝쟈워푸는 조선 땅과 달리 산도 없고 소 등어리만한 언덕도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조선 사람들이 지금은 근 삼십 호의 조그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아무리 중국 정부로부터 개간권을 부여 받았다지만 이곳에는 물 한 방울 볼 수가 없다. 벼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봇도랑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서 만주 토착민들과의 마찰이 시작된다. 그들은 밭농사를 짓는다. 그런 만주 토착민들에게 물은 치명타다. 만주 토착민들은 군부를 끌어들이고 급기야 경상도 사투리 하던 노인이 총에 옆구리를 맞아 희생되고 창권이도 다리에 관통상을 입게 된다.

 

이태준의 소설 『농군』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당시 조선민중들의 생존을 위한 끈질긴 투쟁을 그린 소설이다. 사실적 묘사로 현장감이 돋보이는 소설이기도 하다. 또 이태준이 순수문학에서 현실참여로 눈을 돌린 계기로 평가받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농군』은 일제의 정치적 야욕에 협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소설이기도 하다. 바로 소설의 배경이 된 만보산 사건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조선 사람들과 만주 토착민들의 갈등만 언급되지만 만보산 사건의 본질은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마련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농간이었다는 것은 당시 언론을 통해서도 이미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보산 사건

 

만보산 사건은 1931년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과 만주 토착민들간에 벌어진 충돌이다. 당시 일본은 만보산 지역의 미개간지를 조차하고 이를 다시 조선 농민들에게 10년 기한으로 빌려준다. 조선 농민들은 벼농사에 필요한 수로를 개척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보게 된 만주 토착민들은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경찰은 만주 토착민들의 반대운동을 강제 진압하고 수로를 완성시켰다. 그 과정에서 만주 토착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수백명이 봉기하여 완공된 수로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때 현장에 있던 조선 농민들과 만주 토착민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 만보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만주 토착민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일본은 이 사건을 만주 토착민들의 만행이라고 조선에 보도함으로써 조선에서는 중국인들에 대한 살인과 테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의해 진실이 밝혀졌고 이 내용을 보도했던 <동아일보> 기자는 일본관헌에게 피살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만보산 사건의 본질은 당시 만주 지역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조선 민족운동세력과 중국 민족운동세력의 반일 공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로 계획된 사건이었다.

 

소설적 허구인가, 의도적 배제인가

 

당시 이태준은 만주를 다녀와 『만주기행』이란 수필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고 한다.

 

만주에서 가장 오랜 편이요 가장 큰 문제가 일어났던 곳이요 가장 먼저 조선인의 손으로 큰 수로가 황무지를 관류하게 된 데가 만보산 일원인데 만보산의 여러 부락 중에도신경서 가기 편리한 곳은 쟝쟈워푸라는 데라 한다.”

 

『만주기행』과 『농군』이 발표된 시점이 각각 1938년과 1939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태준도 이미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태준은 왜 사건의 본질은 외면한 채 조선 농민들과 만주 토착민들간의 갈등만을 부각시켰을까?

 
우선은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소설적 허구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이 창작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순수문학을 고집하던 그가 현실참여적 소설로의 시선을 돌리는 판에 일제의 야욕을 애써 눈감을 필요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조선 농민들의 삶을 향한 끈질긴 투쟁에 목적이 있었다면 역사적 사건을 작품 평가의 근거로 사용한다는 게 무리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당시 일제의 사상검열이 더욱 강화되는 시점에서 이를 피해가면서 작가의 의도를 내보이기 위한 일종의 의도적 전술로 이해할 수도 있다.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친 프로작가들에 대한 검거와 탄압 선풍이 일면서 프로문학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반면 일제의 사상검열은 더욱 강화되는 시점이 1930년대 중반 이후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찌됐건 소설 『농군』은 일제의 정치적 야욕에 부합하는 친일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 의도야 작가 자신만이 알 뿐….

 

이태준은 다른 근대 작가들에 비해 친일논란에서 다소 자유로운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친일 강도를 넘어 그도 일제 말기 친일문학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어진 월북. 그의 작품들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신화읽기의 길라잡이;이윤기의 신화 시리즈

2011년 여강여호 서평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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