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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서리를 밞으면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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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태준의 『패강랭』/「삼천리문학」1호(1938.1)/창비사 펴냄

옛 것을 그리워하고 복원을 꿈꾼다면 우리는 흔히
보수라는 말로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특징짓는다. 한편 보수라는 말에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단 우리사회만 한정한다면. 정치지향적 특성이 강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수와 수구의 의미를 혼동하여 사용하다 보니 건전한 의미의 보수가 수구적 이미지로 덧칠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치적으로 보수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과거 군사정권과 같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나타냄으로써 보수의 올바른 정의가 훼손되기도 한다. 옛 것을 지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한국 근·현대 작가 중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로 꼽히는 이태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옛 것에 대한 진한 향수가 느껴진다. 많은 비평가들이 그를 전근대주의 작가니 현실인식이 부족했다느니 하는 평가를 내리는 근거가 되기도 한단다. 한편 그의 소설 『패강랭』에서는 옛 것에 대한 향수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주고 있다.   

 

패강(浿江)은 대동강의 옛이름이다. 이태준의 소설 『패강랭(浿江冷)』을 제목 그대로 해석한다면 대동강 물이 차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 표현은 소설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로 더욱 더 결연한 문체로 바뀐다. 저자 이태준은 대동강의 가을정취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길래 가을 대동강물이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고 표현했을까? 저자는 10년 만에 평양을 찾은 주인공 현을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우리 것에 대한 비통함과 일본 제국주의의 거세지는 회유와 협박을 대동강 물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보는 시선에 따라 옛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저자의 항일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태준이 적극적인 현실참여 작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나 『패강랭』의 행간을 유심히 읽다 보면 저자의 소극적이지만 항일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또 잃어버린 옛 것에 대한 향수라 하더라도 그 원인이 일본 제국주의였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작가인 주인공 현이 10년 만에 찾은 평양은 평양을 상징하던 여자들의 머릿수건이 사라졌고 여흥의 자리에는 재즈와 댄스가 등장했다. 대동강과 대동강 주변의 자연에서 유구한 맛을 느끼던 현에게는 비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친구이자 고등보통학교 조선어 교사인 박과 실업가인 김과의 대화를 통해 현의 나약하지만 지사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저자 이태준은 현을 통해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옛 것의 정체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으로 자신의 시간이 반으로 줄고 만 박을 지싯지싯(남이 싫어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좋아하는 것만 짓궂게 자꾸 요구하는 모양) 붙어있는 존재로 표현하고 작가인 현의 처지를 박의 처지와 동일시한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저항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다니는 학교에서만 지싯지싯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전체에서 긴치 않게 여기는, 지싯지싯 붙어 있는 존재 같았다. 현은 박의 그런 지싯지싯함에서 선뜻 자기를 느끼고 또 자기의 작품들을 느끼고 그만 더 울고 싶게 괴로워졌다. -『패강랭』 중에서-

현이 박과 평양부회의원이기도 한 김과의 기생집 술자리에서 벌이는 대화를 통해 저자의 의지는 좀 더 분명해 진다. 현은 김의 방향전환 요구에 잔이나 받으라며 거부 의사를 밝힌다. 김이 동경으로 건너가 글 쓰는 사람을 언급한 것으로 봐서 방향전환이란 일제에 협력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직업 또한 평양부회의원이니 말이다. 술자리가 깊어지면서 김도 좀 더 솔직한 속내를 현과 박에게 털어놓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자네들 이제부터 실속 채려야 하네.”

, 너희가 아무리 꼬장꼬장한 체해야…” -『패강랭』 중에서-

 

김의 이 말에 현은 마시던 사이다 컵을 김에게 던져 버린다. 현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는 박에 이끌려 대동강가로 나와서는 서리가 내려 은종이처럼 반짝이는 낙엽들을 하나씩 밟으며 <주역(周易)>에 나오는 고사성어를 생각해 내고는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는 말이다. 지식인에 대한 일본의 회유와 협박이 더욱 거세질 것을 암시함과 동시에 저자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태준을 전근대주의 성향의 작가로 평가하는 데는 소설 속 현의 지사적 풍모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그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현실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기생 영월이 부르던 가사에 곡조를 맞추던 박은 다음과 같은 시 한구를 읊어서 소리를 받는다.

 

각한산진수궁처 임정가곡역난위(却恨山盡水宮處任情歌哭亦難爲)

 

신채호 선생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망명할 때 지은 시의 일부로 산도 막히고 물도끝난 곳에 다다라 문득 한탄하노니, 마음 놓고 노래하고 울부짖고 싶어도 그나마 되지 않는구나 라는 뜻이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신화읽기의 길라잡이;이윤기의 신화 시리즈

2011년 여강여호 서평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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