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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순수한 열일곱, 그들의 사랑이 슬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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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김유정의 『동백꽃』/「조광」7호(1936.5)/창비사 펴냄

김유정은 도스토예프스키
, 체호프, 고골, 루쉰 등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짧은 생을 살다간 김유정이 왜 그토록 기층민중의 삶을 묘사하는 데 집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유정이 그려내는 소설들은 농민소설이라기보다 농촌소설에 가깝다. 김유정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농촌현실에 대한 냉혹한 비판보다는 그 농촌을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순박한 삶이기 때문이다. 한편 유쾌한 해학이 곁들여진 김유정의 농촌에는 슬픔이 있다. 김유정의 소설은 잔잔한 미소, 때로는 박장대소 하고 읽다 보면 알 듯 모를 듯 식민지 농촌현실이 영화필름처럼 머리 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김유정표 해학이 주는 매력이다.

 

소설 『동백꽃』도 마찬가지다. 식민지 농촌현실이나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보다는 순박한 산골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랑을 아직 모르는 와 사랑하지만 사랑한단 말 대신 를 괴롭히기만 하는 점순이가 그려내는 일상은 따뜻하지만 슬픈 여운을 남긴다. 그들의 철없던 사랑은 결실을 맺었을까? 강원도 어느 산골 노부부의 얘기였으면 좋으련만

 

는 점순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오늘도 우리 수탉은 점순네 수탉에게 모가지를 쪼여 면두에서는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고놈의 계집애가 요즘 들어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어느날은 감자를 세 개 구워와서는 있는 생색 다 내며 먹으라고 준다. ‘는 고개도 안 돌리고 어깨 너머로 쑥 내밀어버린다. 그 때 보았던 점순의 얼굴. ‘는 무던히도 순진하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전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우리가 이 동리에 들어온 것은 근 삼 년째 되어오지만 여지껏 가무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동백꽃』 중에서-

 

맞다. ‘는 순진하다. 그러나 점순이가 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던들 어쩌란 말인가! 점순이는 마름이고 나는 소작인이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데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 아니 우리 가족의 생계가 달렸다. ‘와 점순이 사이에 이러쿵 저러쿵 소문이라도 난다면 우리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만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

 

순진한 에 대한 점순이의 애정공세는 날이 갈수록 극악(?)해져만 간다. 점순이가 자기집 봉당에서 우리 씨암탉을 암팡스레 패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우리 아버지가 고자라고까지 놀린다.

 

욕을 이토록 먹어가면서도 대거리 한마디 못하는 걸 생각하니 돌부리에 채어 발톱 밑이 처지는 것도 모를 만치 분하고 급기야는 두 눈에 눈물까지 불끈 내솟는다. -『동백꽃』 중에서-

 

여전히 점순이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한 는 점순이의 애정공세가 심해질수록 분한 마음만 더해간다. 급기야 우리 수탉에 고추장을 먹여 화끈한 복수를 하고 만다. 가만 있을 점순이가 아니다. 얼굴 예쁜 점순이가 오늘 보니 그 눈깔이 꼭 여우새끼 같다. 어쩔 수 없다. 내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 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하고 울음을 놓았다. -『동백꽃』 중에서-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순이는 를 덮치고 만다. 동백꽃 향기에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했다. 비로소 는 알았다. 아니 알 것 같다. 점순이는 를 사랑하고 있었다. 마름의 딸 점순이와 점순네 땅을 빌어먹는 소작농 아들 는 사랑할 수 있을까요?

 

동백꽃은 동백꽃이 아니다

 

소설 『동백꽃』을 읽어본 독자라면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있을 것이다. 노란 동백꽃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 중에서-

 

노란 동백꽃이라니, 요즘이야 원하는 대로 꽃의 빛깔을 만들어 낼 수는 세상이 되었지만1930년대 노란 동백꽃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이라고 한단다. 전라도 어느 지역을 가면 고구마를 감자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강원도 아리랑이나 정선 아리랑에 나오는 동백도 생강나무를 이르는 강원도 사투리란다.

김유정은 남녘 바닷가에 만발한 동백꽃의 향긋한 내음을 알고 있었을까?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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