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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도진개진 인생들의 도토리 키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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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치숙』/「동아일보」(1938.3.7~14)/창비사 펴냄

 

도진개진이라는 말이 있다. 윷놀이에서 도가 나오나 개가 나오나 거기서 거기란 뜻일 게다. 표준어인지 사투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 하나다. 한자의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와 같은 말이다. 도토리가 제 아무리 크다 해도 재보면 다 고만고만하다는 뜻이다. 도진개진 인생들, 도토리들만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채만식의 『치숙(痴叔)』은 폼나는(?) 인생들이 너 잘났냐, 나 잘났다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채만식은 이들을 고만고만한 도토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들이 채만식에게 밉보인 이유를 들어보자.

 

채만식의 풍자는 전방위적이다. 『치숙』에서는 등장인물 모두가 풍자의 대상이 된다. 등장인물이래야 기껏 세 명뿐이다. 풍자기법 또한 독특하다. 먼저 등장인물과 배경을 살펴보자.

 

『치숙』은 화자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화자는 다름아닌 조카다. 화자에게는 오촌관계인 고모 부부가 있다. 오촌고모부인 아저씨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징역을 살고 현재는 출소해서 폐병을 앓고 누워있다. 아주머니는 열 여섯 살에 아저씨한테 시집왔다 소박맞고 친정으로 쫓겨났으나 재가하지 못하고 다시 아저씨에게로 돌아와 현재는 삯바느질, 품빨래, 화장품 장사 등으로 겨우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있다. ‘치숙은 앓아 누워있는 아저씨를 이르는 말이다.

 

첫 번째 풍자의 대상은 아저씨다. 채만식은 조카의 시선과 입을 통해 알량한 지식인의 무기력함을 비판하고 있다. 조카는 아주머니가 불쌍하다. 아니 앓아 누워있는 아저씨가 빨리 죽었으면 한다. 조카가 보는 아저씨는 이상만 쫓을 뿐 현실감각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 아주머니가 불쌍하다는 조카의 타박에 아저씨의 대답이 가관이다. 지식인의 속물 근성 바로 그것이다.

 

고생을 낙으로, 그 쓰라린 맛을 씹고 씹고 하면서 그것에서 단맛을 알어내는 사람도 있느니라. 사람도 있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무슨 일에고 진정과 정신을 꼬박 거기다가만 쓰면 그렇게 되는 법이니라. 그러니까 그찜 되면 그때는 고생이 낙이지. 너이 아주머니만 두고 보더래도 고생이 고생이면서 고생이 아니고 고생하는 게 낙이란다.” -『치숙』 중에서-

 

병이 나은 후에라도 아주머니의 은공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하지 않냐는 조카의 말에 아저씨는 얼버무린다. 『치숙』에서 보여주는 채만식 풍자의 하이라이트다.

 

바뻐서 원….” -『치숙』 중에서-

 

조카가 작중화자인 탓에 아저씨에 대한 비난과 풍자는 소설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채만식의 풍자는 막을 내리는 것일까? 이게 끝이라면 풍자소설의 대가 채만식의 체면이 말이 아닐게다. 다음 풍자 대상은 독자가 찾아내야 한다. 바로 조카다. 아저씨가 주체의식이 너무 지나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지식인이라면 조카는 주체의식이 너무 없어 비굴함을 비굴함으로 느끼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의 전형이다.

 

채만식은 조카로 하여금 아저씨의 무능력을 폭로하게 하고 독자는 이런 조카의 태도를 비판하게 함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다양한 군상들을 풍자하는 효과를 거둔다.

 

조카에게는 나라 뺏긴 설움도, 일본인 지주 아래 사는 비굴함도 없다. 그에게는 돈만 벌게 해준다면 또 그 돈이 장미빛 미래를 가져다 준다면 정신까지 일본인으로 살고 싶은 군상이다. 아주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은 이런 조카의 태도로 보아 사회주의자인 아저씨에 대한 반감에서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조선 학교도 조선말도 싫다. 자본주의 일본은 침략자가 아닌 그의 이상이다.

 

내 이상과 계획은 이렇거든요.

우리 집 다이쇼(주인)가 나를 자별히 귀애하고 신용을 하니깐 인제 한 십 년만 더 있으면 한밑천 들여서 따로 장사를 시켜줄 그런 눈치거든요.

그러거들랑 그것을 언덕 삼아가지고 나는 심십 년 동안 예순 살 환갑까지만 장사를 해서 꼭 십만 원을 모을 작정이지요. 십만 원이면 죄선(조선) 부자로 쳐도 천석꾼이니. 머 떵떵거리고 살 게 아니라구요?

그리고 우리 다이쇼도 한 말이 있고 하니까 나는 내지인(일본인) 규수한테로 장가를 들래요. 다이쇼가 다 알아서 얌전한 자리를 골라 중매까지 서준다고 그랬어요. 내지 여자가 참 좋지요.

나는 죄선 여자는 거저 주어도 싫어요. -『치숙』 중에서-

 

나폴레옹까지 언급하는 조카의 말에서는 무지가 아닌 무자각의 소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저씨가 조카의 무자각을 깨우치려 하지만 아저씨의 무능력에 몰입한 나머지 합당한 훈계의 정당성마저 결여되는 아쉬움이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읽어야 되는 이유다. 풍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으니 말이다. 채만식은 자각하지 못한 조선민중들을 조카로 대신 보여주려 했던 것일게다. 그렇다면 후에 변절을 하지 말았어야지!

 

젠장, 아저씨두….요전 『낑구』라는 잡지에두 보니까, 나뽀레옹이라는 서양 영웅이 그랬답디다. 기회는 제가 만든다구. 그리고 불가능이란 말은 바보의 사전에서나 찾을 글자라구요.” -『치숙』 중에서-

 

어느 광고에 숨어있는 1인치를 찾으라는 카피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풍자에서 자유로웠을까? 소박맞고도 개가하지 못하고 다시 병든 남편에게로 돌아온 아주머니도 풍자라면 풍자의 대상은 아니었을까? 일색소박은 있어도 박색소박은 없다는 말을 빗대어 아주머니의 무력함과 전근대적 인습을 벗어나지 못한 조선사회를 풍자하고 있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때로는 소설의 내용보다 작가의 불꽃같은 삶이 보잘 것 없는 소설에 감동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변절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운 소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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