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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태어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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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게 여기가 따뜻한 남쪽이기 때문인지 한 달 넘게 칼바람을 휘두른 동장군의 기세가 꺾인 탓인지 모르겠지만 일 년만에 고향에서 맞는 아침이 상쾌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제 야근하고 눈도 붙이지 못하고 내려와서 오자마자 잠에 빠져 꼭두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서 오랫만에 동네 목욕탕도 가보고 조카들 세뱃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편의점에 들러 현금도 인출하고 이른 새벽부터 사람사는 냄새로 가득한 수산시장도 둘러보고 시간이 남아 집 앞에 있는 PC방에 들렀습니다. PC방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컴퓨터 켜는 데 한참 걸렸네요.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데 무슨 말인지 주인장에게 물어보자니 좀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혼자 고민고민하다 눈앞에 보이는 테이블 번호를 입력했더니 경쾌한 음악소리와 함께 익숙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설날 아침인데도 여기저기서 들리는 게임하는 소리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집니다.

어제 까치들은 설날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오늘은 우리우리 설날이니 까치들의 시샘이 들리는 듯 보이는 듯 합니다. 

오늘은 또 여강여호 생일입니다. 겨울에 아니 설날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여강여호랍니다.

어디를 가든 생년월일을 얘기하면 다들 신기한 듯 쳐다보곤 하죠. 누구든 365일 중 한 날을 택해서(?) 태어나건만 설날이 주는 특별한 뉘앙스가 있나 봅니다. 일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설날만은 꼭 고향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설날과 생일이 겹쳐 누구보다 기분이 좋을 듯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어릴 때야 마냥 좋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늘 부모님께 죄스런 마음뿐입니다. 오늘도 친척 어른들 모이면 그러시겠죠. '좋은 날 어머니 고생시키고 태어났으니 잘해', '다른 것 다 필요없어,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게 부모한테 효도하는 거야'....어른들의 이런 말씀이 한때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죄스런 마음으로 바뀌더군요. 부모님이야 아들놈 스트레스받을까봐 아무 말씀하시지 않지만 그 마음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좀 있으면 친척 어른들 다 집으로 오실텐데 벌써부터 긴장됩니다.

그래서 올해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선물은 당장 못해 드리지만 다른 때보다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몸만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같이 일하는 형님이 산양산삼농사를 하고 있어 부탁했는데 땅이 너무 꽁꽁 얼어 캘 수가 없답니다. 제가 늘 이렇습니다. 미리미리 준비했으면 충분히 가능했을텐데, 설날에 닥쳐서야 이러니....시중에 판매하는 걸로 준비해도 되는데 추석 전에 부모님 두 분 생신이 있어 그 때 드리려고 그냥 빈 손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나마 그 형님께는 미리 예약해 두었죠. 그냥 내려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도 무거운지.
 
제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내려오기 전 친구 녀석들이 먼저 부모님께 인사드리려 왔더군요. 근데 그 노총각 자식들 우리 부모님께 올해 결혼한다고 말씀드렸나 봅니다. 제가 집에 들어서자 마치 당신 아들 일인양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안그런 척 하면서도 왜 그리도 제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죄송스럽던지...게다가 저한테는 특별히 어떤 계획이 있느냐 물어보시지도 않더군요. 그래서 올해는 결혼해야 꼭 행복한 건 아니지 않냐는 항변도 못했습니다. 

손님들 북적대는 설날이라 저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를 볼 때면 늘 마음 한구석이 짠해 집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생일에 왜 파티를 하냐며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고마워해야지 왜 흥청망청 즐기기만 하냐구요.

이번 설에도 아니 이번 생일에도 마음만 전해드리고 가야 한다니.....설날에 태어난 아이는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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