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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이런 아내 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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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의 <빈처>/1921년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짤막한 대사가 인상깊던 드라마가 있었다. '부부 클리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매회 새로운 주제로 이혼을 둘러싼 부부들의 사랑과 갈등을 다룬 옴니버스 드라마였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부부의 갈등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는 얼핏 보면 막장 수준이었지만 시청자의 제보로 제작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이혼 사유들은 부부의 개인적인 갈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부부갈등의 원인을 세심히 들여다보면 경제적이고 사회구조적인 원인들이 심심찮게 발견되곤 한다. 특히 이런 원인으로 인한 이혼 사유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갈등이 오로지 부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이혼 사유 중 경제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1996년에는 3.5%였으나 2008년에는 14.2%로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나는 왜 낯설은 통계까지 들이대며 사랑을 얘기하고 이혼을 얘기하는 것일까? 현진건의 소설 『빈처』를 읽는 내내 아내의 선택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뒷맛이 개운치 못했더 이유에서다.

이런 아내 또 없습니다

현진건의 소설 『빈처』에서 혹여나 아내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늘날 시각으로 따지자면 충분히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남편의 무능력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그러나 여전히 무능력한 남편에게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문제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살펴볼 여지가 다분하다. 빈처(貧妻)라는 제목만 보자면 '가난한 아내'지만 사실은 '가난한 남편'이다. 가난한 남편 때문에 가난한 아내로 살아야만 하지만 아내는 또 가난한 남편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다.


빈털털이 작가 남편을 위해 아내는 오늘도 장농을 열고 옷가지들을 뒤적이고 있다. 가구와 옷을 전당포에 맡겨 아침거리라도 장만하기 위해서다. 장모가 인사불성이 된 사위를 위해 인력거를 불러줘도 '그 인력거삯을 나를 주었으면 책 한 권을 사 보련만' 하고 취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남편이니 할 말 다했다. 좀체 싫은 내색도 없다. 이런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은 '누구하고 싸움이나 좀 해보았으면, 소리껏 고함이나 질러보았으면, 실컷 울어보았으면'하는 감정이 부글부글 피어오른다. 남편은 자신의 무능력을 아내에 대한 화풀이로 확인하려 든다.

"막벌이꾼한테나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어!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

때로는 사랑의 위대함으로 애써 자위하려든다.

"그것 보아, 돈푼이나 있으면 다 그런 것이야."

남편의 사촌이 제 처에게 준다면 내놓은 흰 비단 바탕에 두어 가지 매화를 수놓은 양산을 보아도, 친정 언니가 남편에게 졸라 샀다는 윤이 흐르며 색색이 빛나는 품 좋은 비단 옷감을 보아도 부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아내다. 무능력한 남편이지만 이런 아내가 안쓰러웠던지 아내가 평생을 두고 처음 듣어본 감동멘트를 하나 날려준다.

"나도 어서 출세를 하여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이내 아내와 남편은 부둥켜 안고 뜨거운 키스를 하며 그렁그렁 눈물을 흘린다. 남편은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

아내의 사랑은 진심이었을까?

아내의 사랑이 눈물겹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작가 현진건의 한계이기도 하고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다. 아내의 사랑은 진심이었을까? 어쩌면 강요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진심어린 사랑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소설 속 아내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의심한 적이 없었을까? 일부종사의 구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아내와 그런 여성을 단순히 개인적인 사랑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작가. 작각 현진건은 여성과 부부문제를 좀 더 사회적 안목에서 바라볼 수는 없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또 아내의 일탈과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줄 드라마적 긴장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싱거울 수도 있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식민지 시기 소설사를 전공한 박헌호의 분석대로 소설 속 주인공이 현진건 자신의 직업인 작가라는 점에서 지식인적 폐쇄성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최근 이혼율이 급증한 데는 이혼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바뀐 탓도 있지만 여성, 취업, 실직문제 등 사회구조의 불안정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가난한 아내와 그녀를 안쓰럽지만 천사처럼 바라보는 가난한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만으로 살 수는 없지만, 사랑 때문에 살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의 진실을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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