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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적산가옥(敵産家屋)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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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의 <양과자갑>/1948년

1층을 덮을만큼 뾰족 튀어나온 2층 처마, 영화에서나 본듯한 벽난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난스레 크게 들리던 발자국 소리. 어릴 적 자주 놀러갔던 친구의 집은 여느 집과는 달랐다. 뿐만아니라 숨을 길게 들이마시면 바다내음이 가득했던 그 동네는 친구네 집과 비슷한 꼴의 주택들이 늘어서 있어 이국적 향취를 물씬 풍기곤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살던 집이라고만 들었다.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런 집들을 적산가옥(敵産家屋)이라고 불렀다.  

적산가옥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국에 지어 살았던 집으로 말 그대로 적국의 재산이나 적국인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살았던 이 적산가옥은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되고 정부는 부족한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적산가옥을 불하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니 적산가옥은 슬픈 역사의 산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직도 서울은 물론 인천이나 목포, 군산, 포항 등 항구도시에는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1948년 <해방문학선집>에 발표된 염상섭의 단편소설 『양과자갑』은 적산가옥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해방과 동시에 시작된 미군정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세상과 타협하는 인간 vs 타협을 거부한 인간

적산가옥의 안채와 뒤채에는 양공주로 추정되는 주인집 가족과 영수네 가족이 살고 있다. 영수네 가족은 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압박을 받으며 살고 있다. 어느날 주인이 가져온 적산가옥의 불하와 관련된 미군의 쪽지 한 장은 오갈데없는 영수네 가족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여기서 세상을 살아가는 대립되는 인간 군상들을 보게 된다.

분명 친인척 관계가 아님이 확실한 주인 여자와 흑구자로 묘사된 또다른 안채에 사는 여자는 이 주인없는 땅, 적산가옥을 요리집으로 꾸미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살고 있다. 또 영수 아내도 남편의 영어실력을 기회삼아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미국 유학 출신이지만 미군정청 사환만큼도 돈을 못 버는 대학 시간강사인 영수는 자신의 영어실력이 이익을 얻는 데 사용되는 것을 거부한 채 밤낮 술로 허송세월하고 있다. 융통성없는 인간의 전형이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영수라는 인물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당시로서는 드문 미국 유학파라는 사실보다 그가 왜 현실을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는 미국 유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해방되기 전 두 번의 유치장 신세를 졌다. 정확한 이유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진보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영수가 세상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바로 서지 못한 현실에 대한 자포자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미군은 해방군이었을까? 점령군이었을까?

영수의 현실을 바라보는 속내는 주인집 여자가 건넨 양과자갑에서 드러나게 된다. 미군이 주인집 여자와 흑구자에게 적산가옥을 불하한다는 내용의 영문 쪽지는 영수 대신 딸 보배가 번역해 주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주인집 여자가 건넨 것이 바로 양과자다.

"이런 처지란 어떤 처지란 말요? 딸자식을 시켜 그따위 연놈의 그런 더러운 편지쪽이나 번역을 시켜가며 사탕 알갱이나 얻어먹고 앉았어야 할 처지란 말야?"

연놈이란 주인집 여자와 미군을 말한다. 영수는 양과자갑을 휙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만다. 왜 하필 양과자갑이었을까? 비록 무능력했지만 자존심 하나만은 지키며 살고자 했던 지식인 영수에게 적산가옥은 일제의 잔상이요, 양과자갑은 해방 공간에서 또다른 점령군 행세를 하는 미군정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양과자갑에는 해방은 되었지만 여전히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고뇌가 오롯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영수 아내가 흩어진 양과자를 다시 줍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깝고 더럽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염상섭의 소설 『양과자갑』은 미군정을 배경으로 하는 흔치 않은 소설이다. 현실을 요령껏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과 그렇지 못한 인간들의 대립구도도 흥미롭지만 그 뒤에 감춰진 불합리한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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