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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처녀를 사랑한 유부남, 자유연애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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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어린 벗에게>/1917년

춘원 이광수는 육당 최남선과 함께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이 두사람에게는 한국 문학사적 업적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각각 <2·8독립선언서>와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위대한 천재 문학가들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변절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만 했던 이들을 보면서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벗에게』를 살펴보기 전에  저자 이광수에 대한 짤막하나마 약력을 소개해야만 하는 것도 아픈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삼기 위함이다. 출판사의 이광수 소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춘원 이광수는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립신문>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후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친일 활동을 하게 된다. 1917년 최초의 근대장편소설로 평가되는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 이름을 떨친다. 6·25때 납북되어 1950년 사망했다.

『어린 벗에게』는 『무정』과 비슷한 시기에 잡지 <청춘>에 연재된 계몽주의 소설이다. 소설로는 독특하게 서간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편지를 받는 어린 벗은 특정인을 지칭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당시 봉건적 사고방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민중을 아우르고 있다 할 수 있다. '어린 벗'이라는 단어에서도 저자의 계몽주의적 가치판단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나(임보형)는 상하이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나 청복을 입은 어느 여인의 간병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 그 여인은 6년전 내가 일본유학시절 사랑했던 친구의 동생 김일련이었다. 내가 상하이에 온 것도 김일련에게 거절당한 실연의 아픔 때문이었다. 내가 어떠했길래 김일련은 나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을까? 나는 유부남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 그저그런 불륜이 아니다. 저자는 당시 사랑이 배제된 채 집안끼리의 결합으로 결혼에 이르게 되는 전근대적인 인습을 비판하기 위해 이런 파격적인 설정을 하게 된다.

"나는 조선인이로소이다. 사랑이란 말은 듣고 맛은 못 본 조선인이로소이다. 조선에 어찌 남녀가 없사오리까마는 조선 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본 일이 없나이다. 조선인의 흉중에 어찌 애정이 없사오리까마는 조선인의 애정은 두 잎도 피기 전에 사회의 습관과 도덕이라는 바위에 눌리어 그만 말라 죽고 말았나이다. 조선인은 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로소이다. 그네가 부부가 될 때에 얼굴도 못 보고 이름도 못 듣던 남남끼리 다만 계약이라는 형식으로 혼인을 맺어 일생을 이 형식에만 속박되어 지나는 것이로소이다." -『어린 벗에게』중에서-

실연의 아픔으로 방황하던 나는 어느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러시아 의용함대에서 김일련을 만나게 되고 그 배가 수뢰에 부딪쳐 침몰하면서 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게 된다. 마치 영화 [타이타닉]을 연상시킨다. 결국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되고 기차에 동승하여 정처없는 길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나는 이제는 명일 일을 예상할 수 없고 순간 일을 예상할 수 없나이다. 다만 만사를 조물의 의에 부하고, 이 열차가 우리를 실어가는 데까지 우리 몸을 가져가고 이 영혼을 끌어가는 데까지 우리는 끌려가려 하나이다. - 『어린 벗에게』중에서-

저자 이광수는 이처럼 자유연애사상을 담아내기 위해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 극적효과를 살림과 동시에 여전히 봉건주의적 습관에 젖어있는 조선민중들에게 새 시대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계몽주의적 관점을 배제하고라도 여운을 남긴 채 소설을 마무리함으로써 과연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전체 4신의 서간문 형식으로 구성된 『어린 벗에게』는 춘원 이광수의 만만치 않은 필력을 확인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받은 편지를 개봉하기 전 설레임과 사랑고백을 거절당한 후 겪는 나의 심리상태, 조선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대목에서 보여주는 섬세한 묘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8독립선언서> 초안작성을 왜 이광수가 주도했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못내 아쉬운 점은 그렇게 뛰어난 필력을 끝까지 조선민중을 위해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참고로 그가 일제 말기 내선일체 주장과 조선 젊은이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쓴 친일 글들에는 이런게 있단다. 제목만으로도 변절한 지식인의 추한 모습이 분노를 자아낸다. <모든 것을 바치리>, <폐하의 성업에>,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 <내선일체와 조선문학>, <가끔씩 부른 노래>...무려 100편이 넘는다고 한다. 춘원 이광수에 대해 단순히 문학사적 업적만을 얘기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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