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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극한의 상황이 만든 이기적인 인간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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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태형>/1922~1923년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 '미스트'를 기억할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심리상태가 그만의 독특한 영상기법으로 극적 분위기를 더해주는 영화다. 영화 제목 그대로 대형마트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안개로 휩쌓여있다. 짙은 안개 속에서는 의문의 끔찍한 살인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대형마트에 갇히게 된다. 의문의 살인범은 다름아닌 인근 군부대의 비밀실험으로 탄생한 괴물이었다. 이 사실을 알리 없는 대형마트 손님들은 패닉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인간들이 겪는 심리상태와 공포를 이겨내는 과정이다.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형마트내 사람들은 의외로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라는 커모디 부인의 해석에 따라 이에 동조한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자고까지 한다.

이중의 공포에 맞닥뜨린 주인공 데이비드는 가까스로 아들, 부모와 함께 대형마트를 탈출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결국 집단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세 사람을 권총으로 살해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눠보지만 총알은 단 세 개뿐, 자동차 밖으로 나온 데이비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마지막 절규를 한다. 순간 웅장한 소음과 함께 안개가 걷히면서 대형마트내 손님들을 태운 군용차가 지나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미스트'가 죽음의 공포 앞에 나약해진 인간을 그리고 있다면 김동인의 소설 『태형』은 극한의 상황에서 지극히 이기적이 되어가는 인간 군상들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형벌 중 하나였던 '태형'은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말년의 김동인.  출처>한국일보

소설의 배경은 감옥이다. 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만큼 감옥 안의 상황이 심각했냐는 읽는 이의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 나에게 감옥은 죽음 그 자체였다. 소설은 태형을 이끌어내기 위해 감옥 내부의 열악한 상황과 주인공 '나'의 심리상태를 점층적으로 열거해 간다.

"다섯 평이 좀 못되는 이 방에, 처음에는 스무 사람이 있었지만, 몇 방을 합칠 때에 스물여덟 사람이 되었다. 그때에 이를 어찌하나 하였다. 진남포 감옥에서 공소로 넘어온 사람까지 서른네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신의주와 해주 감옥에서 넘어온 사람까지 하여 마흔한 사람이 된 때에 우리도 한숨도 못 쉬었다. 혀를 찼다." -『태형』중에서-

"나라를 팔고 고향을 팔고 친척을 팔고 또는 뒤에 이를 모든 행복을 희생하여서라도 바꿀 값이 있는 것은 냉수 한 모금밖에는 없었다." -『태형』중에서-

다섯 평 감옥에서 생활하는 마흔한 명 어느 누구도 성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의 열기로 온몸을 썩이고 똥오줌 무르녹은 냄새, 살 썩는 냄새, 옴약 냄새, 땀 썩은 냄새, 간수도 가까이 와서 들여다보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다 진찰감에 갈 행운을 얻은 나에게 바깥공기는 달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다섯 평 감옥을 나가준다면 그게 죽음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서 어느 영감의 태형 구십 대 판결은 결코 연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공소하려는 영감에게 집단 언어폭력이 시작되었다. 주도한 이는 나였다.

"여보! 시끄럽소. 노망했소? 당신은 당신이 죽겠다구 걱정하지만, 그래 당신만 사람이란 말이요? 이 방 사십여 인이 당신 하나 나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지는 건 생각지 않소? 아들 둘 다 총 맞아 죽은 다음에 뒤상 하나 살아 있으면 무얼 해? 여보!" -『태형』중에서-

결국 영감은 공소를 취하하고 만다. 태형 구십 대는 칠십 대 노인에게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설정이 조금은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태형』을 통해 김동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한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성의 상실이고 달리 표현하면 인간성 회복이다.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적절한 주제 설정이냐하는 것이다. 삶 자체가 투쟁이었던 당시 조선민중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을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말년 행적을 곱게 보지 못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감옥에 수감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세운동으로 끌려온 사람들이다. 은연 중에 조선민중들의 대일본 투쟁이 폄하되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 부딪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 '미스트'와 소설 『태형』에서 보듯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다양한 형태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나약해 지기도 하고 이기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싸웠던 사람들도 많았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핵심은 변절자들을 벌하기 위함보다는 변절의 유혹을 이겨내고 조국과 민족의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인 선인들의 정신을 되살리는 작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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