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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슬픈 모순, 백화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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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식의 <슬픈 모순>/1918년

올해는 전태일 열사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평화시장 봉재공장 재봉사였던 그는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 자결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대한민국 노동자의 권리와 삶은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글쎄...

대한민국 천만 노동자는 경제의 최일선을 담당하고 있다는 권력과 자본의 추임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저임금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가 수백만이고 살을 애이는 북풍한설에도 차가운 아스팔트로 내몰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재벌가 어떤 이는 백주대낮에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에게 '매값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단다. 사회주의권 몰락과 함께 독주체제를 갖춘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노동자 탄압은 교묘함을 넘어 노골적이 되고 있다. 전태일 열사 40주기에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일상의 믿음을 재고해 본다.

1917년 발표된 양건식의 『슬픈 모순』은 이 땅에 유입된 자본주의로 인해 생겨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천부인권을 타고 태어난 인간이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모순은 슬프다. 이를 바라보는 지식인도 슬프다. 아니 저자 자신도 슬픈 모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다 정신질환을 앓고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가 본 것은 모순으로 점철된 자신의 모습이었다

 
▲『슬픈 모순』은 <반도시론> 11호에 실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된 191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조국 해방과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가 가져온 자본주의로 인해 추락을 거듭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참한 삶에 대한 자각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고뇌였을 것이다. 『슬픈 모순』 도입부에 주인공 '나'의 방에 걸려있는 '노동복을 입은 노국 문호 막심 고르끼의 반신상'은 작가 양건식이 고민해야만 했던 자각의 단면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는 산란한 꿈을 꾸고 경성 시내를 방황한다. 나의 방황은 단순한 가출이 아니다. 당시 경성에 펼쳐진 대비되는 사람들을 통해 슬픈 모순을 자각해 가는 과정이다. 뚱뚱한 기름 흐르는 얼굴에 분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새아씨 볼 줴지르게 바르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색주단으로 전신을 감고 아주 점잖은 척 걷고 있는 궐녀가 있고 저만한 지게에 제 힘에도 과해 보이는 짐을 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 하이칼라 술집에 들어갔다 헙수룩하고 끄레발한 노동자라는 이유로 쫓겨난 막벌이꾼이 있는가 하면 그 막벌이꾼의 뺨을 후려갈기는 관복입은 순사가 있다. 주인공 '나'의 말대로 기묘한 대조요, 심한 모순이다.

그가 경성 시내에서 본 것은 궐녀와 아이, 막벌이꾼과 순사의 모순만이 아니었다. 현실의 장벽에 산산히 깨져가는 자신의 꿈과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는 어느덧 허위의 옷을 두르고 있는 지식인에 불과했다. 이 모순을 슬퍼하는 까닭이다.

백화가 죽었다

저자의 현실에 대한 당시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은 백화의 죽음을 통해 절정으로 치닫고 소설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도입부의 산란한 꿈은 백화의 죽음을 예고한 복선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생 백화는 달랑 편지 한 장 남겨놓고 구천으로 돌아가고 만다. 백화의 편지를 통해 당시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민을 압축해 보여준다. 또 백화는 아버지가 귀족의 첩으로 보내려는 동생 동순이를 '나'에게 부탁한다. 봉건시대의 잔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저자의 의지가 엿보인다.

저자 양건식이 백화(白化)를 등장시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백화(白華)는 양건식의 호이기도 했다. 백화의 등장과 죽음은 당시 저자가 목도하고 고민해야만 했던 슬픈 모순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행동으로 모순과 싸우지 못했던 당시 지식인이 자신만이 할 수 있었던 글을 통해 슬픈 현실을 보여주고 그 현실에 부딪치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부끄럽다. 작가 양건식을 처음 알았고 당시 지식인들이 조국 해방만큼이나 자본주의가 양산해 낸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고뇌가 있었음을 처음 알았다. 왜 그동안 교과서에서는 작가 양건식을 소개하지 않았을까? 이 또한 슬픈 모순이다.

양건식이 자각해야만 했던 1910년대, 전태일 열사가 분신으로 말하고자 했던 1970년대 그리고 오늘 2010년 노동자의 삶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을까? 현실과 타협하는 지식인이 마치 지식인의 표상인양 포장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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