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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그리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 중에는 사르페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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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사르페돈Sarpedon은 리키아(고대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있었던 왕국)의 왕자로 (트로이 편에서 싸운)트로이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호메로스(Homeros,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사르페돈은 제우스와 라오다메이아의 아들로 리키아군의 부사령관  글라우코스의 사촌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 사르페돈은 전쟁 영웅으로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존경을 받았다. 영웅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사르페돈을 죽였다. 제우스의 도움으로 사르페돈의 시신은 고향인 리키아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제우스에게 사르페돈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에우로파. 메트로박물관 소재

<일리아스>에서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사르페돈은 키메라를 죽이고 날으는 말 페가수스를 생포한 영웅 벨로로폰의 손자이다. 코린토스에서 온 벨로로폰은 티린스의 왕 프로이토스의 아내 스테네보이아의 배신으로 리키아의 이오바테스 왕을 섬기고 있었다. 이오바테스 왕을 섬기는 동안 벨로로폰은 불을 뿜는 괴물 키메라와 마주쳤다. 키메라는 뱀의 꼬리와 사자와 염소의 몸통을 가진 괴물이었다. 벨로로폰은 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날으는 말 페가수스를 길들일 수 있었다. 페가수스는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였을 때 메두사의 머리에서 태어난 말이었다.

 

벨로로폰은 이산데르, 히폴로코스 그리고 사르페돈의 어머니가 될 라오다메이아 등 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산데르와 히폴로코스는 리키아의 왕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상속 전쟁을 막기 위해 형제들은 어린 아이의 가슴에 걸린 반지를 화살로 맞추는 경기를 제안했다. 라오다메이아가 그녀의 아들(사르페돈)을 표적으로 내놓겠다고 하자 아들의 두 삼촌과 사촌인 글라우코스는 그들의 주장을 철회했고 사르페돈을 리키아의 왕으로 추대했다.

 

다른 신화에서는 사르페돈을 제우스와 에우로파의 아들이자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동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사르페돈과 미노스는 크레타의 왕위를 놓고 경쟁한다. 내분의 결과 사르페돈은 소아시아로 유배되어 리키아의 왕이 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트로이에서 싸운 사르페돈은 미노스의 동생 사르페돈의 손자로 묘사되어 있다. 즉 트로이 전쟁의 영웅 사르페돈은 같은 이름의 미노스의 동생인 사르페돈의 손자라는 것이다.  

 

힙노스와 타나토스에 의해 옮겨지는 사르페돈 시신.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재.

 

트로이 전쟁은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 의해 납치된 사건 때문에 발발했다. 메넬라오스 왕은 스파르타 해안에 침입한 트로이의 무례함에 분노해 동생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설득해 모든 동맹군을 모아 아내인 헬레네를 데려오기 위해 트로이로 진격했다. 에게해를 항해했던 그리스 함대는 천 척 이상이었다. 10년 동안 지속된 트로이 전쟁은 많은 영웅들이 참전했고 심지어 양측으로 갈린 올림피아 신들도 참여했다. 전쟁은 그리스 군이 거대한 목마를 이용해 성 안으로 들어가 도시를 약탈함으로써 끝이 났다.

 

사르페돈 휘하의 리키아 군대는 트로이의 모든 동맹군들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르페돈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 아이네이아스와 함께 가장 위대한 트로이 영웅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히폴로코스의 아들 글라우코스는 사르페돈과 함께 크산토스(터키 서남부에 있는 고대 도시) 부대를 이끌고 트로이로 갔다. 유명한 전사였던 글라우코스는 전쟁터에서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그리스 군대를 이끌고 있는 그리스의 영웅 디오메데스를 만났다.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는 서로 말을 주고받던 중 서로의 조상에 대해 알게 된다. 결국 두 전사는 서로 싸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공교롭게도 두 전사의 할아버지들도 과거에 서로 우정의 유대를 나누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들의 갑옷을 선물하면서 이별을 고하는 것으로 우정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사르페돈은 다름 아닌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를 만나게 된다. 전투 끝에 틀레폴레모스가 패배하고 죽지만 사르페돈도 그의 왼쪽 허벅지를 다치게 된다.

 

사르페돈은 전쟁 기간 동안 헥토르를 비난할 정도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르페돈은 헥토르가 격렬한 전투를 트로이군이 아닌 트로이 동맹군에게 맡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헥토르는 부하들을 결집시키고 그리스 진지를 향해 진군했다. 사르페돈과 그의 사촌 글라우코스 그리고 또 다른 트로이 동맹인 아스테로파이오스도 헥토르가 그리스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것을 도와 그리스 요새를 습격했다.

사르페돈 시신을 옮기는 힙노스와 타나토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재.

 

한편 그리스 진영에서는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과 그리스 전사들 중 가장 용맹한 것으로 알려진 아킬레우스 사이의 다툼으로 아킬레우스와 그의 미르미돈 군대는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킬레우스의 부재는 트로이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그리스 함선 중 하나가 트로이군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때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전장으로 다시 돌아가 달라고 간청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절친이었던 파트로클로스의 요청을 거부하고 대신 파트로클로스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 주어 트로이군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다고 믿고 있었던 사르페돈은 마침내 전쟁터에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은 파트로클로스를 만났다.

 

제우스는 그의 아들이 죽음에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는 사르페돈을 전투에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헤라는 제우스에게 많은 신들의 자식들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우스의 그런 개입을 다른 신들이 호의적으로 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제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손에 의해 죽은 사르페돈의 시신이 리키아로 돌려보내 질 것을 약속받음으로써 헤라와 타협했다.

 

사촌의 죽음으로 고통과 슬픔에 빠진 글라우코스는 헥토르에게 트로이 동맹군에서의 그의 역할을 다시 상기시켰다. 양측 모두 리키아 사령관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사르페돈 시신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트로이군이 시신에서 갑옷을 벗기자 아폴론이 잠의 신 힙노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데리고 나타나 시신을 깨끗이 씻은 뒤 리키아로 돌려보내 주었다. 글라우코스는 사르페돈의 뒤를 이어 리키아군을 이끌었다.

 

사르페돈은 트로이 전쟁 참전과 그가 크레타에서 추방되어 어떻게 리키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신화 때문에 소아시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르페돈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크산토스였다. 그는 기원전 5세기 경 크산토스의 아크로폴리스에 매장되었고 이후 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규모 사원 단지가 건설되었다. 사르페도네이아로 알려진 이 사원 단지에서는 정기적으로 리키아의 영웅을 기리는 경기가 개최되었다.

 

사르페돈 이야기는 다양한 예술에서 발견되는데 그와 관련된 예술 작품의 대부분은 그의 죽음과 힙노스와 타나토스에 의해 그의 시신이 처리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현재 뉴욕 맨하탄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벨-크라테르(고대 그리스의 꽃병으로 와인을 물로 희석하는데 쓰임)에는 에우로파가 제우스에게 사르페돈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과 사르페돈의 시신이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에우로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사르페돈은 1874년 앙리 레비(Henri Levi, 1840년~1904년, 프랑스)가 그린 유화에도 등장한다.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힙노스와 타나토스가 사르페돈의 시신을 그의 아버지 제우스에게 전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사르페돈에 관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은 에트루리아에서 제작된 키스타라고 불리는 바구니의 청동 손잡이로 전장에서 사르페돈의 시신을 운반하는 잠의 신 힙노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게 사르페돈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면 아킬레우스에게 살해당한 에티오피아의 왕 멤논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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