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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타협을 거부한 지식인의 핍박, 결국 親日로 돌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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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의 <핍박>/1917년

1992년을 잊지 못한다. 그해 총선이 있었고 대선이 있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성인이 되어 행사할 수 있는 투표라는 행위를 하게 되었다. 투표뿐만 아니라 직접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경험까지 했다. 나는 당시 백기완 대통령 후보와 민중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물론 선배의 권유도 있었지만 소위 전교조 1세대인 나로서는 이미 고등학교 때 희미하게나마 현실에 눈을 떴던 것 같다. 그 당시 선거운동 참여도 나름대로는 자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이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기까지는 고민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선배들은 민중세력의 정치세력화를 두고 직접 참여하자는 쪽과 보수야당의 비판적지지를 통해 때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나뉘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운동권도 아니었고 지금 비록 활동가는 아니지만 그 때 그 선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무튼 짧은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고민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때 그 기억을 되살리면 허탈감이 밀려온다. 당시 내가 지지했던 많은 진보인사들이 아니 권력으로부터 빨갱이(?)이라 비난받던 많은 이들이 현재 보수정권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자 하는 내가 바보는 아닌지 또 다른 고민 아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핍박>,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주다

현상윤의 단편소설 <핍박>의 주인공 '나'는 부모도 평강히 계시고 형제는 단란히 즐기며 아내는 해죽이 웃고 썩지 않은 생선이 몇 가지 상에 오르고 더럽지 않은 채소를 가끔 그릇에 담을 수 있으며 신경질의 세상도 추이를 대강은 짐작하고 있는 평범한 지식인이다. 그러나 그는 먹는 밥이 달지 아니하고 잠이 편치 못하며 친구를 만나도 웃음이 발하지 않는 고통스런 병을 앓고 있다. '나'는 '핍박'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이나 납북작가로도 유명한 현상윤의 <핍박>은 짧지만 근대 단편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문학사적으로 근대 단편소설의 시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김동인보다 훨씬 앞서 발표된 근대 단편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핍박>의 주인공인 '나'가 앓고 있는 핍박이라는 병의 실체는 무엇일까?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려는 지식인의 고뇌, 그러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작가가 처한 시대적 상황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상윤의 <핍박>을 집필한 1913년은 일본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조선을 강탈한 시기이기도 하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지식인은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누구보다 먼저 인식한다. 이런 탓에 지식인은 자의건 타의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 투쟁할 것인가. 핍박은 주인공인 '나'가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내면적인 고민이자 고통이다. 아아 핍박! 못살게 구는 핍박!

지나가는 취객의 말에 인생과 행략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어리고 철없는 놈아 무엇이 어째. 권리니 의무늬 윤리니 도덕이니 평등이니 자유니 무엇이 어째. 나는 다 모른다." -[20세기 한국소설] 현상윤의 <핍박> 중에서-

'나'는 취객의 말에 인생과 행락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진다. 목은 타고 손은 더욱 단다. 그러나 안타깝다. 핍박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나'를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담아냈던 현상윤도 결국에는 그의 글재주를 일제 말기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는 데 이용하고 만다.

'핍박병'을 앓는 지식인이 많은 사회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그만큼 권력과 자본의 억압이 거세지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식인들이 인생을 향유하기만 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역사의 질곡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이미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지식인에게 건강을 해치지 않는 한도내에서의 '핍박감'은 깨어있는 사회를 위한 긍정적인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권력의 독선과 아집으로 바람잘날 없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핍박병'을 앓고 있는 지식인이 얼마나 있을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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