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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유토피아, 꿈이 아닌 현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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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 ‘U(없다)’‘topos(장소)’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없는 땅이란 뜻이다. 단어만 놓고 본다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유토피아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왜 한낱 망상에 불과한 유토피아를 저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베이컨은 벤살렘 섬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유토피아를 방문하는 수 밖에 없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서무슨 수로 방문한단 말인가! 걱정마시라. 책이 있지 않은가! 책에서는 가지 못할 곳이 없으니 말이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쓴 [유토피아]의 원제는 <사회 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의,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해서의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이다. 오늘날 이상사회라는 의미의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만들어낸 신조어였다. 그는 당시 초기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든 영국사회에 실망했고 그 대안으로 유토포스란 자가 정복해서 유래했다는 꿈의 섬유토피아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유토피아]란 책이 씌여진 시대적 상황을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허구의 세상인 유토피아를 왜 그토록 많은 사상가들이 언급했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400년 전 토마스 모어가 그렸던 유토피아는 어떤 사회였을까? 또 토마스 모어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21세기와는 어떻게 다를까?

유토피아 섬의 정책결정은 54개 도시에서 각각 연로하고 경험이 풍부한 세 사람을 아마우로툼(꿈의 도시) 연례회의에 파견해 이루어졌다. 각 도시에는 200명의 시포그란투스라는 공무원이 있어 비밀투표로 시장을 선출했고 도시의 중요한 문제들은 시장과 시포그란투스 총회를 통해 결정되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건 유토피아에서 공무원들은 아버지로 불렸다고 한다.
오늘날만큼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공무원이 아버지로 불렸다니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행복한 섬, 유토피아에도 전쟁이라는 단어가 있었을까? 아쉽지만 또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노예도 있었다고 하니 선뜻 수긍이 가질 않는다. 유토피아의 한계인 듯 싶다. 다만 유토피아인들은 전쟁을 불명예로 생각했다. 확실한 명분이 있지 않는 한 군사훈련은 방어의 개념이었다.
분명 명분없는 전쟁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21세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개념만 본다면 진보된 사회였음이 틀림없다. 유명한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도 얘기했듯이 최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종교전쟁이라는 단어까지 동원되는 오늘의 현실 때문인지 유토피아의 종교에 관한 언급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손색이 없다. 당시로서는 언급하기 힘들었던 종교의 자유가 이 유토피아에는 있었다. 유토피아에는 이질적인 종교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따로 신을 지징하지 않았다. 모든 종교에 있어 신은 유토피아어로 미트라스로 통일된다. 각 종파가 견해를 달리하는 점은 과연 어느 신이 미트라스인가 하는 것이다.

이 밖에 [유토피아]에는 동화같은 얘기도 있다. 나머지는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살짝 얘기하자면 금이 돌보다 못하단다.

일부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유토피아는 21세기보다 못한 것도 있고 21세기에 추구해야 될 것도 있다. 그렇다면 많은 사상가들이 유토피아를 언급한 이유는 자명해진다. 유토피아는 망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이 반영된 발랄한 상상, 이것이 유토피아의 참모습이다. 만화가 그랬던 것처럼...

앞서 전쟁과 노예를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한계로 지적했지만 정작 한계는 토마스 모어 본인에게 있었다고 한다. 그가 유토피아에서 언급했던 종교관과는 반대로 현실에서 그는 종교개혁에 반대해 신교도 박해를 묵인했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유토피아] 마지막 부분에서 라파엘이 유토피아 섬에 대한 얘기를 끝마쳤을 때 귀족정치와 모든 권위의 존엄을 우려하기도 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는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가 늘 추구해야 되고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항해 싸우는 다양한 활동들도 종국에는 유토피아에 좀 더 다가서려는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400년 전 토마스 모어가 꿈꿨던 유토피아가 아닌 우리만의 유토피아를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한다. 당신이 꿈꾸는,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결코 망상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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