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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책 빌려달라 보채는 형님이 귀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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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왔어?”
“죄송해요
, 깜빡했어요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 다 읽었단 말이야. 언제 줄꺼야?”
“내일은 꼭 갖다드릴께요

요즘 출근하면 첫 대화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보다 9살이나 많은 낼 모레면 하늘의 뜻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형님입니다. 책 빌려달라 보채는 형님의 얼굴이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집니다.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은 구입하고 나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인데 빌려준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다 읽었나 봅니다. 집중력이 대단해 보입니다. 어쩌다 저와 형님의 출근인사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와 형님은 밤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 창조했건 그 무엇으로부터 진화됐건 인간은 모름지기 낮에 일하고 밤에 자야 하거늘 밤낮이 바뀌다 보니 그 피로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형님은 아침에 퇴근해서 저녁에 출근하기 전까지 일을 하나 더 하고 있습니다. 소위 투잡족이죠. 여기까지만 해도 나를 놀래키기에 충분했는데 주말에는 또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시골에 내려간답니다. 시골에 산양산삼을 재배하고 있어 매주 내려가서 관리해 주어야 한다네요. 참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렇다 보니 밤에 출근하면 산삼에 관한 다양한 얘기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산삼의 효능, 한국삼과 중국삼을 구분하는 방법, 산삼과 인삼 그리고 산양산삼과의 차이 등등...그러면서 형님이 운영하고 있는 카페를 보여주더군요. 물론 산삼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입니다. 회원수도 몇 명 되지 않는 아주 소박한 카페였습니다. 쭉 둘러보고는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카페에 형님네 산삼을 판매한다는 내용은 없네요
“판매는 무슨
...”
“그럼 옥션이나 지마켓 같은 데서 판매를 해보시죠
? 아니면 쇼핑몰을 직접 운영해 보시던지..”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 돈이 되다 보면 욕심을 부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양심을 속여 판매할 수도 있고...나도 아직까지 산삼에 대해 배우고 있는 중이라
...”

시쳇말로 감동 먹었습니다. 우리 산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제블로그에 이 형님이 운영하는 카페 링크를 걸어두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그리고는 며칠 후에 생색 좀 내봤습니다.

“형님, 요즘 방문자수 좀 늘지 않았어요?”
“응
, 한자리 수에서 두자리 수로 늘었던데. 참 네 블로그에 책들 많이 소개되었더라
“네
, 그냥 읽기만 하다가 나도 나이가 먹다 보니 깜빡깜빡해서 메모해 둔다는 생각으로 책 읽을 때마다 정리해 두고 있어요
“나도 젊었을 땐 책 꽤나 읽었는데
, 일에 치이고 애들 키우느라 책하고 멀어진 지 한참 된 것 같다.”
"책이 내 업도 아닌데, 짬 날 때 읽는 거죠 뭐
“그렇지
? 책도 좀 읽으면서 살아야 되는데, 그럼 내가 읽을만한 책 좀 소개해 주지
?”

목에 힘 좀 주려고 시작한 대화가 이렇게 결론이 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저로서는 기분좋은 요청이었죠. 한가지 걱정은 있었습니다. 산양산삼 재배까지 하면 투잡이 아니라 쓰리잡인데 피곤해서 책 읽을 시간이나 있을까 싶어서요.

이런 걸 두고 기우라고 하나 봅니다. 결코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읽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해 처음에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이라는 책을 빌려드렸는데 며칠 만에 다 읽었다며 반납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야, 쉬운 책으로 소개해 달랬더니, 어렵잖아.”
“그래요
? 아무튼 다 읽으셨으니까 독후감도 제출하세요
“독후감 제출해야 다른 책 빌려주는 거야
? 너무한다.”
“이번에는 신화 책 한 번 읽어보실래요
? 아무래도 어디선가 들어본 내용들이라 읽기 쉬울 것 같아서요
“아무튼 빌려줘 봐
.”

어느덧 형님과 저녁에 일터에서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농담의 주제까지도...늘 출근할 때 가방에 책 두 권을 넣고 다닌 터라 그날은 마침 [유토피아] [스칸디나비아 신화]가 있길래 [스칸디나비아 신화]를 빌려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퇴근 무렵에 형님이 그러시더군요.

“스칸디나비아 신화, 10페이지 남겨놓고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
“빨리 읽으세요
. 그래야 또 빌려드리지
“이제야 알겠더라
, 프리미어 리그 팀들 상징하는 그림들이 북유럽 신화에서 나왔다는 거, 알고 보니까 더 재밌던데
“대단하십니다
. 그래서 신화를 읽는 게 아닐까요?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그 와중에 벌써 다 읽어가다니, 전 집중력이 약해서 책 한 권 읽는데 일주일이 걸리는데, 그래도 재미는 있죠? 신화 이야기라.”
“오랜만에 책을 읽을라니까 만만치가 않더라
. 스칸디나비아 신화도 바이킹 이야기하고 오딘이라는 신밖에 기억 안 난다.”
“그게 어딘데요

이 형님 프리미어 리그 팬이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거든요. 그리스 로마 신화요. 이거 읽어보실래요?”
“알았어
. , 여기 스칸디나비아 신화
“아직
10페이지 남았다면서요? 마저 다 읽으세요
“그럴까
? 앞으로는 1주일에 꼭 책 한 권은 읽어야겠어. 내 목표다

오늘 아침에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 1권을 빌려드렸습니다. 저와 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책을 빌려달라는 형님이 고맙고 앞으로는 1주일에 책 한 권씩 읽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 어린애처럼 순수해 보입니다. 모처럼 블로그 하는 보람을 느낀 며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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