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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이집트

태양신 아텐 숭배가 단기간에 그쳤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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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신왕국 18왕조의 10대 왕 아케나텐(또는 이크나톤, 아멘호테프 4세, 재위기간은 BC 1379~BC 1362)은 그의 통치기간 동안 이집트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아텐Aten 유일신 숭배였다. 사람들은 그의 급진적인 정책에 반대했고 결국 그에게는 이단자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며 그의 이름은 이집트 파라오 목록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아톤Aton이라고도 불렸던 아텐Aten은 태양 원반으로 태양신 라Ra의 현현으로 숭배되었다. 아텐 숭배는 아멘호테프 4세 통치 기간 동안 국가 종교로 승격되었다. 훗날 아멘호테프 4세는 그의 이름을 ‘아텐에 봉사하는 자’라는 뜻의 아케나텐으로 바꾸었다.

 

아텐은 태양 원반 그 자체였다. 출처>구글 검색

아텐이 신으로써 처음 언급된 것은 제12왕조 시절 <신우헤 이야기>라는 문학작품과 <사자의 서>를 통해서다. 아텐의 상징은 태양 원반으로 태양 원반에서 빛을 발산했고 앙크와 함께 소멸되었다. 다른 신들과 달리 아텐은 인간의 형태로 표현되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파라오에 귀속된 이름으로 나타났다. 가령 아멘호테프 4세의 다른 이름인 아케나텐Akhenaten과 같은 파라오 이름에서 아텐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케나텐 즉 아멘호테프 4세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는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그러한 급격한 변화들이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수용되지 못했다. 다양한 신 숭배는 수천 년 동안 이집트 종교의 본질이었다. 즉 오랜 기간의 다신교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케나텐은 그의 통치 시절 국민들에게 아텐 숭배 즉 일신교를 강요했다.

 

아케나텐 통치 초기 그와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는 많은 신들과 여신들 특히 아문을 숭배했다. 당시 이집트의 수도는 위대한 아문 신전이 있던 테베였다. 아문의 사제들은 이 기간 동안 부와 권력을 얻었으며 심지어 그들의 부와 권위는 파라오를 능가하기도 했다. 태양과 생명을 주는 태양의 힘을 관찰한 후 아케나텐은 아텐을 어디에나 있는 우주의 생명력으로써의 태양 원반 신으로 해석했다. 그는 아텐이 유일한 신이라는 믿음으로 아텐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새 종교를 확립하기 위해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는 위대한 아문 신전이 있는 테베 대신 새로운 수도 아케타텐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다신교 전통을 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케나텐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아텐으로 대표되는 태양 원반에 대한 숭배는 아문과 다른 신들의 숭배를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태양신 아텐을 위한 새로운 신전들이 지어졌고 당시까지 아멘호테프 4세였던 그의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텐 즉 아멘호테프 4세는 자신을 이집트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묘사하면서 아텐을 자신과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보았고 지상에서 유일한 아텐의 대리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아텐 신전 사제들에게 더 많은 힘과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 거의 폭정에 가까운 아케나텐의 종교적 통치 아래서 태양 원반에서 발산되는 빛은 오로지 왕실 가족들에게만 비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일반 국민들은 아텐 숭배가 아무리 간절해도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부부를 통해서만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아텐 숭배에 대한 아케나텐의 집착은 이집트를 군사적 약체로 만들었고 히타이트인들에게 일부 땅을 점령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유일신 아텐 숭배는 이집트 국민들의 지지도 거의 받지 못했다.

 

아텐 신전은 이전 신전들과 달리 지붕이 열려 있고 화려해서 신전 안으로 빛이 넘쳐 흘렀다. 신전에는 우상 숭배로 간주되어 신의 동상이 없었지만, 사제들에 의해 파라오 즉 아케나텐 부부가 지상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다른 신들의 신전은 유일신 아텐 이름으로 파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케나텐은 아문이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마저 신전에서 지워버렸다.

 

정상적으로는 왕을 포함했을 돌기둥이나 동상에 있어서 전통이 바뀌었고 왕의 부부가 이를 대신했다. 심지어 네페르티티는 적을 학살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런 이미지는 왕을 상징화하기 위해 엄격하게 보존되었다. 아케나텐은 형식적이고 뻣뻣한 스타일에서 뾰족한 팔다리와 원뿔 모양의 머리로 그래진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예술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왕실의 친근한 순간조차도 묘사되었는데 아텐의 광선 아래서 키스하는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의 이미지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기원전 1336년 아케나텐의 죽음과 동시에 유일신 아텐에 대한 숭배도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도시였던 아케타텐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아케나텐이 통치하기 전에 있었던 다신교 숭배로 돌아갔다. 아케나텐의 지위는 이단자로 격하되었고 심지어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사용하기를 피했고 그의 이름 대신 이단자나 반역자로 불렀다. 신전에 새겨진 아케나텐의 이름도 지워졌고 그의 이름은 이집트 파라오 공식 목록에서도 제외되었다.

 

고대든 현대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특히 급진적인 변화가 폭압적인 방식으로 시행될 때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태양신 아텐이 아케나텐 통치 기간에 왕실을 비추었을지는 모르지만 고대 이집트 국민들에게 희미한 기억만을 남겼을 뿐이다. 결국 고대 이집트에서 아텐 숭배는 창조신 관념에 대한 관심이 성장한 결과였으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일신론적 숭배를 처음 보여주었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번성했다 사라졌던 운명 탓에 아텐 숭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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