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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그리스

아이네이아스는 어떻게 로마의 전설적인 조상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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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아이네이아스Aeneas(로마식으로는 아이네아스라고 부름)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 모두에 등장한다. 그는 트로이 전쟁으로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트로이의 장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나 지금의 이탈리아 땅으로 들어왔다. 신화의 로마 버전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와 그의 동료들은 로마를 세웠으며 그 자신은 로마의 첫 번째 위대한 영웅이자 로마의 전설적인 조상이 되었다.

 

아버지를 업고 트로이를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 출처>구글 검색

어느 날 그리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 신화의 베누스)는 이다 산 언덕에서 앙키세스Anchises를 보았다. 여신은 이 젊고 잘생긴 남자의 매력에 빠져버렸고, 그를 유혹해 아이네이아스를 낳았다. 아이네이아스는 다섯 살 때까지 산의 요정들에 의해 길러졌고 이후 아버지 앙키세스에게 보내졌다. 아프로디테는 앙키세스에게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 줄 것을 약속 받았다. 앙키세스는 약속을 지켰지만 끝내 벼락을 맞고 말았다. 또 다른 전설에서 앙키세스는 벼락을 맞고 장님과 절름발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공격했을 때 아이네이아스는 즉각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몇몇 신화에 따르면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그의 소들을 훔친 후에야 트로이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아이네이아스가 이렇게 머뭇거렸던 것은 트로이의 왕 프리암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프리암 왕의 아들 헥토르가 트로이군의 최고사령관이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또 프리암이 아이네이아스를 싫어한 이유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프리암의 자손이 아닌 아이네이아스의 자손들이 미래 트로이를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이 전쟁 동안 아이네이아스는 프리암 왕의 딸들 중 한 명인 크레우사와 결혼했고, 아스카니우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다룬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이아드>의 등장인물이기도 했다. 그리스 전승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는 헥토르 다음으로 트로이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꼿꼿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신들에 대한 존경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신들은 아이네이아스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아프로디테뿐만 아니라 포세이돈과 아폴론도 그의 편에 섰다.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아이네이아스에게 트로이가 곧 함락될 것이기 때문에 이다 산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새로운 왕국을 세우라고 경고했다. 나중에 이다 산 근처의 몇몇 도시들은 아이네이아스가 그들 도시의 창건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트로이를 탈출했다고도 하고, 그의 명예와 경건함에 감복한 그리스인들이 그가 트로이를 떠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도 한다.

 

기원전 700년 경, 그리스인들은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시실리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신화는 종종 그리스 영웅들은 이 식민지들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특히 시민들은 스스로를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후손들이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40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의 파괴를 피해 이탈리아로 갔다는 이야기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네이아스의 다음 이야기는 그리스인이 아닌 로마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기원전 300년 경 로마는 지중해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도시가 점점 확대되고 강력해지면서 딜레마에 직면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많은 신화와 전설을 공유했고, 그리스의 고대 문화를 존중했다. 동시에 로마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이 그리스의 그것에 의해 가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로마인들은 많은 신들과 영웅들을 그들 자신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로마의 작가들은 로마 건국 무렵 이탈리아에 왔어야 할 아이네이아스와 전설적인 과거와의 완벽한 연관성을 발견했다. 게다가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과 분리된 조상을 설정할 수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아이네이아스에 대한 많은 로마 신화가 발전했다.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아프로디테와 헥토르의 메시지가 그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도록 설득할 때까지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아들의 손을 잡은 채 지지자들과 함께 불타는 트로이를 탈출했다. 이 혼란 중에 아이네이아스의 아내 크레우사는 탈출 대열에서 이탈했고 아이네이아스는 그녀를 찾기 위해 다시 트로이로 돌아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이다 산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 달 후 그들은 서쪽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오늘날 이탈리아라고 부르는 땅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강력한 폭풍과 사나운 괴물들을 물리친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드디어 북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했다. 도중에 그의 아버지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로마의 이야기꾼들은 영웅의 역사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창시자인 디도 여왕의 초기 이야기와 섞기 시작했다.

 

로마 전설에 따르면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는 서로 사랑에 빠졌고 신들의 전령인 머큐리(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가 그의 운명이 이탈리아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줄 때까지 여왕과 함께 지냈다. 아이네이아스는 슬프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다시 이탈리아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디도 여왕은 절망에 빠졌고 급기야 불타는 화장용 장적더미에 몸을 던졌다. 배에서 이를 지켜보던 영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행은 시실리 섬에 도착해 일부는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아이네이아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강력한 예언자 시빌에게 조언을 구했다. 거기에서 아이네이아스는 디도의 유령을 보았지만 그녀는 아이네이아스에게 한마다의 말도 걸지 않았다. 그 때 그는 아버지 앙키세스의 유령도 보았는데 앙키세스는 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버지의 예언에 용기를 얻은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라티움으로 갔다. 그는 라티움 왕의 딸 라비니아와 약혼했다. 루툴리라고 불리는 또 다른 부족의 지도자 투르노스는 트로이 이민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라티움 시민들의 도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이네이아스는 라비니아와 정식으로 결혼했고, 그곳에 라티움과 트로이의 연합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리비니움의 지도자가 되었고 알바롱가라는 제2의 도시를 건설했고 이곳을 트로이-라티움 시민들의 수도로 만들었다. 이 도시들은 고대 로마의 기초가 되었다. 어떤 전설에서는 아이네이아스가 직접 로마를 건설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전설에서는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인 로물루스Romulus에게 그 영광을 돌리기도 한다.

 

이후 로마 역사가들은 아스카니우스를 아이네이아스와 라비니아의 아들로 만들어 즉 아스카니우스를 라틴 태생으로 만들어 새롭게 로마 기원 이야기를 썼다. 원래 아스카니우스는 아이네아스와 트로이 프리암 왕의 딸 크레우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아스카니우스는 이울로스 또는 율리우스Julius로 바뀌었고 로마인 일족이 그에게서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의 조카 아우구스투스는 그 일족의 일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로마의 통치자들의 계보는 반신반인 아이네이아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많은 작가들이 아이네이아스에 대해 썼지만 가장 완벽한 이야기는 기원전 30년에서 20년 사이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쓰여진 <아이네이드>일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참고해 아이네이아스에 대한 전설과 전통을 라틴어로 로마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아이네이드>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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