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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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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殿)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의 [간] -

저항시인 윤동주와 목에 맷돌을 달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오버랩되는 시다. 프로메테우스는 압제에 저항하는 의지의 상징이다. 그리스 신화를 읽어본 독자라면 윤동주가 그의 시에 프로메테우스를 끌어들인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떻게 저항의 상징이 되었을까?.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반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 3편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는 오만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오만해서 인간이 돌이 되기도 하고, 믿음이 강해서 돌이 인간이 되기도 한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신화 속에 숨어있는 상징들을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유일하게 인간을 사랑한, 인간을 위해 간이 뜯기는 고통을 감수한 아주 특별한 신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제우스의 번개에서 불을 훔쳐다 줌으로써 인류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약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신이기도 했다. 이 점을 이용해 제우스에게 반란을 시도했던 것이다. 즉 오만해진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네우스를 코카서스산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 독수리에게 간이 뜯기는 고통을 주는 처벌을 가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프로메테우스만 인간을 사랑하고 제우스는 인간을 싫어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제우스는 인간이 불을 사용하고 이성을 얻음으로써 오만해질 것을 염려했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고 판단력을 갖춤으로써 오히려 전쟁이나 반목같은 혼란스러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게 제우스의 판단이었다.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한 제우스의 변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프로메테우스의 인간 사랑은 작은 사랑이요, 제우스의 그것은 큰 사랑이라는 것이다.
누가 인간을 더 사랑했냐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신화는 오만해질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 뿐이니까.

저자는 신화를 통해 오만한 인간에 대한 경고만을 나열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따뜻한 심성이 가져다주는 해피엔딩도 잊지 않고 있다. 바로 피그말리온 이야기다. 자신이 조각한 여인의 석상을 사랑한 피그말리온의 믿음과 정성은 이 석상의 내부에 피를 흐르게 했고 딱딱한 겉면은 보드라운 살이 되게 했다. 결국 이 여인의 석상은 갈라테이아라는 뭇 여성의 이름을 얻어 피그말리온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

저자는 프로메테우스, 피그말리온 외에도 니오베,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 펠레우스, 벨레로폰 등의 이야기를 통해 신화 속 상징들을 보여준다. 이 상징은 저자가 신화를 믿느냐는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신화를 믿는다고 해서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깍아놓고 내 색시가 되게 해달라고 아프로디테에게 비는 식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신화의 진실이다. 피그말리온의 진실과 그가 기울이는 정성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권력의 오만과 독선으로 인해 분열과 반목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 우리의 영웅 프로메테우스를 벌한 제우스의 우려가 현실 속에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준 이성을 제멋대로 유용한 오만은 비극의 전주곡이자 예견되는 파멸이다. '미리 생각하는 자' 프로메테우스는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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